동요를 부르며 얻은 깨달음
오늘 아침, 아기와 함께 동요를 듣다가 ‘문어와 오징어’라는 노래를 처음 접했다. 내가 어릴 적엔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동요라 가사를 유심히 들어보게 되었는데, 내용이 무척이나 참신했다.
문어와 오징어가 만나서
친구를 하기로 했어요
자 우리 이제 악수하자
다리를 내밀어 보았죠
문어다리 하나 오징어다리 하나
문어다리 두울 오징어다리 두울
문어다리 셋 오징어다리 셋
(중략)
문어다리 일곱 오징어다리 일곱
문어다리 여덟 오징어다리 여덟
오징어 다리 두 개 남았네
이걸로 무엇을 해줄까
...
그렇다. 문어는 다리가 8개, 오징어는 10개. 하나씩 악수를 나누다 보니, 오징어의 다리가 두 개 남는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 남은 두 다리로 무엇을 할까? 35살 어른인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부끄럽게도 참기름 올린 마요네즈에 찍은 마른오징어 다리 두 개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가사는 예상 밖이었다.
활짝 뻗어 안아줄게
친구야 친구야 사랑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결말이 있을까?
악수를 8번 하고도 남은 두 다리를, 자기 자신이 아닌 친구를 안아주는 데 쓰는 오징어라니.
나는 나와 다른 이를 마주하면 손가락질하기 바빴고, 누군가를 위해 손 하나 내미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그런 우리에게, 8개의 악수와 2개의 포옹을 마친 오징어가 묻는 듯하다.
너는 누구에게 한 손이라도 내밀어 본 적이 있느냐고.
오징어 다리 함부로 씹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손이라도
내밀어 본 적 있느냐
한때 우리는 작은 입술로 아름다운 동요 가사를 읊조리던 아이들이었다.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고, 고마우면 “고마워” 말하고, 미안하면 솔직하게 사과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그 모든 것을 잊었다.
경쟁하고 비교하는 어른이 되었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러던 우리가 부모가 되자, 다시 아이와 함께 동요를 부른다. 그리고 또 한 번 배운다.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는 법, 고마움과 미안함을 마음 그대로 표현하는 법을.
“아기를 키우다 보면 유행하는 노래는 듣지도 못하고 동요 가사만 달달 외우게 된다”던 회사 동료의 말이 떠오른다. 그땐 동요만 부르는 그날이 왠지 암담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의 나는 7살 시절로 돌아간 듯 동요를 흥얼거리며 잠시나마 순수를 되찾는다.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왜 엄마들은 손이 두 개 밖에 없는 걸까요?
- Milton Berle
오늘 밤, 아기를 재우며 상상해 본다. 지금 내게 열 개의 손이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첫 번째 손으로 너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고,
두 번째 손으로는 아직 감기지 않은 네 눈꺼풀을 살짝 쓰다듬겠지.
세 번째 손으로는 통통한 네 볼을 어루만지고
네 번째 손으로는 살짝 차가운 네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다.
다섯 번째 손은 조그마한 가슴 위에 살포시 올려 토닥이며,
여섯 번째 손은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살며시 닫아줄 거야.
일곱 번째 손은 조용히 네 귀를 감싸 시끄러운 소리를 막아주고,
여덟 번째 손은 네 코끝에 닿아 작은 숨결이 점점 고르게 퍼지는 걸 느껴볼 거야.
그리고 남은 두 손으로는,
너를 꼭 안아줄게.
그렇게 꿈속에서 우리는 엄마 오징어와 아기 오징어로 다시 만나, 열 개의 다리를 꼬옥 맞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