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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근웅 Oct 17. 2023

20대, 내 이름은 일년만

축구선수로 20대를 맞이했다.

20살은 막내입니다. 

지난 글은 나의 유년시절부터 청소년기의 축구 스토리였다면 이번글은 20대의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 우승을 맛보면서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팀 성적이 우수한 선수들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바람일 뿐.

내가 가고자 했던 대학교의 입학원서는 합격소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축구부의 대학 입학과정은 팀 전국대회 성적에 따른 점수와 연령별 대표팀에 대한 개인점수가 반영이 된다. 팀 성적이 우수하면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이 유리하다. 또한 선수 본인의 역량을 대학교 감독들에게 보여주어 스카웃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도 성적이 뒷받침돼야 입학이 수월했다. 

나는 A대학교에 입학하기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되어있었고 실기만 잘 준비하면 됐다. 날짜에 맞춰 실기를 보았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예상외로 처참한 결과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보다 팀 성적이 더 좋은 학교의 친구가 합격이 되고 예비 2순위로 떨어진 것이다. 

멘붕이 왔다.

불합격 통지를 받은 그날, 운동 시간에도 온통 내 머릿속에는 불합격한 사실에만 휩싸여 있었다. 그 탓에 제대로 운동이 될 리 없었다. 이미 결과는 나왔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다른 대학교에 원서를 넣어두었었고 며칠 후, 한 곳의 합격 연락을 받았다. 

내가 1지망으로 원했던 학교가 아니었지만 축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그렇게 입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축구부의 3월은 일반 학생들보다 일찍 시작한다. 

일반 대학생이라면 입학시기에 맞춰 3월에 학기를 시작하지만, 축구부는 보통 3월에 열리는 춘계대회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준비를 일찍이 시작한다. 빠르면 11월 중 늦어도 12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동계훈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12월에 대학교 숙소에 미리 들어갔고 신입생 소개를 하며 새로 만나게 되는 친구들,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고등학교에서 최고참 노릇을 하다 대학교에 오니 다시 막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의 20살 대학생 축구선수가 시작되었다. 


나의 대학교 1학년 막내시절을 돌이켜 보면 세탁기 앞에 있던 시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정작 제일 중요한 운동장에서의 축구보다 선배들의 빨래를 더 많이 한 것 같다. 아침에 눈뜨면 빨래, 점심 먹고 빨래, 운동 끝나면 빨래, 저녁운동 끝나면 또 빨래..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축구부는 막내가 선배들의 빨래를 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다. 동계훈련 시기에는 특히 운동량이 많다 보니 빨랫감이 눈더미같이 항상 쌓여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런드리고 마냥 하루일과를 빨래로 보냈다. 

정말 세탁 서비스처럼 빨래를 돌리고 끝이 아니라, 널어서 말리고 잘 개어서 선배들 개개인의 사물함에 차곡차곡 넣어줘야 했다.  


내가 맡아야 했던 우리 방 선배들은 5명이었지만, 당시 대학교 축구팀의 총인원은 50명 ~ 55명이었고 세탁기는 4대뿐. 그렇다 보니 매일 세탁기 앞을 지키고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고 막내들은 세탁기 앞이 만남의 장소였다. 우리에게 세탁시간은 담소를 나누며 친목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일 고생한 건 세탁기인 것 같다.. 



K리그의 기본 구조이다.@네이버이미지



1년만.. 1년만 더 해보자

대학교의 운동량은 중고등학교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루에 운동하는 횟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두배로 많아진 것을 느꼈다. 프로에 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부분과 이제 성인이 되어 피지컬적으로도 더 좋아졌기에 선수들의 운동량을 많이 늘리는 것이었다. 나는 경기에 출전하고 싶었고 힘들어도 참아내야 했다. 

경기를 뛰는 것도 50-55명의 모든 축구팀원이 전부 뛰는 것이 아닌, 골키퍼를 제외한 10명의 선수만이 실력을 통해 선발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나는 1학년때부터 경기를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당시 우리 학교는 대학팀과 현재 K4리그 격인 팀을 같이 운영했으며 나의 소속은 K4팀이었다. 

사실상 K4팀에서 경기를 뛴다는 건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팀으로 가는 건 축구를 그만두라는 뜻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 1년 동안 나의 실력을 보여주고 다시 대학팀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했고 실력을 인정받은 나는 1년 뒤 다시 대학팀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의 목표를 이룬 뒤 나는 프로팀 입단을 목표로 세웠다. 

프로팀에 가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여 K1 또는 K2에 입단할 수 있는 확률은 0.8%에 불과하다고 한다. 프로팀 테스트 기회도 매일 오는 것이 아닌 1년에 많아야 한 두 번 정도이다. 그만큼 치열하고 입단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프로팀 입단의 꿈을 저버리지 않고 있었고 매 훈련 때마다 최선을 다했다. 지역 대학리그에서는 매년 우승과 개인상도 수상 하였고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3학년이 끝날 무렵 수도권의 K1프로팀에 테스트를 보게 되었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서 다음 테스트를 기약하였다. 느낌이 좋았다.


시간이 흘러 최종 테스트의 시간이 왔고 입단에 대한 결과가 나오는 테스트였기에 누구보다 간절했다. 

그러나 하염없이 기다린 연락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잔뜩 기대했던 나는 그날 모든 것에 대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프로팀에 입단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또다시 1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했고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나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이 또 주어졌기 때문에 다시 달려야 했다.


어느덧 4학년, 마지막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대학을 졸업하면 축구로 돈을 벌며 먹고살아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팀을 찾아 헤매던 중 세미프로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곳은 내가 축구로 돈을 벌겠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매달 받는 돈은 30만원으로 급여라고 하기에도 말 못 할 액수였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 와중에 3.3% 세금도 떼갔다… 

이 30만원도 부상으로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면 받을 수 없는 돈이다. 대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며 90분 중 60분 이상을 뛰어서 승리했을 경우에는 한경기당 60만원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솔직히 돈을 보고 팀에 온 것도 아니었고 이 팀에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더 나은 팀으로의 이적을 목표로 왔기에 열정페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시작은 좋았다. 

매 경기에 뛸 수 있었고 나의 득점으로 팀 승리도 이끌어냈다. 이대로라면 내가 세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부상이 발목을 잡았고 경기에 계속 출전하고 싶었던 나는 부상부위를 참고 훈련과 경기에 나섰지만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지도자들의 기대에 못 미쳤던 탓인지 어느 날 나는 사회의 쓴맛을 처음 맛보았다. 평소와 같은 아침식사 후, 감독님께서 면담을 진행하자고 부르셨다. 그 자리에서 내가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계약해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탓인지 머릿속이 하얘졌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한 번의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던 선수들은 계약해지가 되지 않았다. 나는 경기명단에 꾸준히 들고 중요한 경기에 내 골로 승리까지 했었는데 6개월 만에 계약해지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충격을 먹을만했다. 도저히 이해를 하기 힘들었지만 이미 결정되었기에 되돌릴 수 없었다. 너무 억울해서 방에 돌아와 짐을 챙기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게 이런 건가… 

당시 룸메이트였던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며 마지막 인사를 하였고 그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몇 마디 건네는 위로의 말보다는 침묵이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위기와 기회 그 사이

그렇게 나는 사회의 쓴맛을 보았고 빠르게 다른 팀을 찾아 나섰다. 

운이 좋게도 공백기 없이 바로 다른 팀을 찾았고 급여도 이전보다는 조금 나은 상태로 옮기게 되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던 나를 비웃듯이 이곳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이 나를 찾아왔다. 

오랜 기간 동안 경기를 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간에 합류한 탓인지 나의 자리는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축구선수가 경기를 못뛰면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껏 축구를 해오면서 오랫동안 벤치조차 지키지 못했던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몰랐고 그로 인해 멘탈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감독님에게 인정을 받는 것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멘탈부터 다시 잡았다.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체력을 만들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체력운동을 하며 무너진 멘탈을 다시 잡기 위해 노력했다. 팀 훈련 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주었고 항상 최선을 다했다. 

이전처럼 계약해지라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도 나는 오로지 축구만을 바라보며 나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왔고 마침내 그 노력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나의 노력이 인정받고 경기에 출전한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고 그 해 감독님이 바뀌고 새로운 감독님이 오셨다. 

새로 오신 감독님은 매주마다 선수들을  테스트하며 본인이 원하는 선수들로 팀을 꾸려 나갔고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나의 능력을 다 보여주었다. 

20명 정도 되는 인원중 5명만 테스트에 통과했고 그 인원 중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더 이상 테스트는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게 됐다. 

테스트에 통과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핸드폰을 봤는데 계약해지라는 문자가 와있었다. 잠이 덜 깬 나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슬픔 보다도 멍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최종인원으로 결정되었고 테스트는 끝났다고 했는데…?

이 것 잘못 보내신 것 아닐까? 하며 어찌 된 영문인지 코치님께 연락을 드려보았지만 문자에 적힌 내용대로 계약해지가 되어서 미안하다고만 이야기해 줄 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이런 힘든 과정을 겪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버렸다. 

나의 머릿속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다. 그렇다 보니 축구가 싫어졌고 그만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축구한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포기하기에는 어린 나이였고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건 축구였기 때문에 다시 한번 도전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이 도전이 나의 축구인생 마지막 도전이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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