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을지로 지하식당
노포가 되기 위한 조건이 있을까?
어느샌가 우린 무심코 노포라 불리는 식당들을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 우리 노포 갈건대 괜찮아?'
'야 이런 날에는 노포로 가야지!'
각각 파는 음식도 다르지만 우리에게 노포란
'오래되어 낡고 허름하지만 음식이 맛있는 집' 정도로 인식되어 있다.
또 노포라 하면 위생과 불친절에 대해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암묵적 동의를 전제에 깔고 있다.
사실 노포는 일본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시니세(老舗, しにせ)'라 불리는 일본어의 한자음을 그대로 따와 '노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말에서 유래한 이유는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치르며 한국에는 오래된 식당 자체가 흔치 않았고
그래서 애초에 오래된 식당을 표현할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외래어를 통해 그 표현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노포라 함은 적어도 50년 이상 영업을 해온 곳들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근현대사적 특성상 20년 이상 영업을 해온 곳들을 노포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유독 노포가 많이 밀집되어 있는데
오래된 전통 시장들이 모여있기도 하고
재개발의 시기가 오랫동안 늦춰지면서
자연스레 오래 영업하고 있는 식당들이 많아졌다.
오래 영업을 한다는 것은 손님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을지로에 위치한 건어물 전문 시장인 중부시장.
말린 생선 냄새가 가득한 이 중부시장에는
낮술의 성지라고 불리는 수상한 식당이 하나 있다.
이름부터 운영 시간, 메뉴 구성까지 모든 것이 수상한 곳.
바로 '지하식당'이 그곳이다.
'지하식당'은 중부시장 내에서도 쉽게 찾기 힘든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중부시장의 메인 골목에서 뻗어있는 좁은 골목을 찾아들어가면
작은 간판이 하나 걸려있다.
지하식당이지만 지하에 있지 않은 지하식당.
식당 내부가 반지하 형태로 살짝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출입구는 양쪽에 위치해 있어 어느 쪽으로 들어가든 상관이 없다.
코로나 기간을 거치며 영업시간이 좀 바뀌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오전 10시에 오픈해 저녁 9시까지 영업을 한다.
토요일은 저녁 6시까지. 일요일은 휴무를 가진다.
낮은 층고로 아늑한 실내에 눈에 띄는 하늘색 도장.
음료 냉장고엔 각종 술, 심지어 와인까지 보인다.
테이블은 겨우 4개, 최대 수용 인원은 14명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사장님 혼자 요리와 서빙을 같이 하신다.
점점 궁금해지는 이곳.
메뉴도 심상치 않다.
LA갈비, 똠얌베이스의 부대찌개, 깔라만시 와사비 볶음밥(?)...
그 외에 멸치국수, 북엇국, 두부조림 같은 조금은 평범한(?) 메뉴들도 함께 있다.
하우스 와인은 2만 원이고 하이볼도 판매하고 있다.
시장에 위치한 만큼 소주, 맥주는 4천 원으로 시중대비 저렴하다.
먼저 방문한 지인의 추천을 받아 2가지 메뉴를 주문했다.
첫 번째로 나온 메뉴는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페코리노 감자칩(15,000원)'.
도톰하게 썬 감자는 바삭하게 구워졌고 꿀이 듬뿍 뿌려져 있다.
감자 위에는 마늘칩이 올려져 있고, 페코리노 치즈로 마무리해 오븐에 살짝 구워낸 듯하다.
이것이 정녕 중부시장의 허름한 식당에서 볼 수 있는 메뉴가 맞는 것일까?
신기하고 신비로운 낯선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잘 익은 감자에 달콤한 꿀, 짭짤한 페코리노 치즈의 조합은 말 그대로 단짠단짠.
맛있게 먹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단맛이 조금 더 강해
술안주로 먹기에는 조금 더 치즈를 듬뿍 뿌려서 먹고 싶었다.
하나씩 집어 먹으며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안주가 나온다.
지하식당의 또 다른 시그니처인 냄비 두부조림(12,000원)에 면 추가(3,000원).
쨍한 레드의 강렬한 두부조림에 스파게티 면이 눈에 띈다.
면 추가(3,000원)를 하면 스파게티 사리가 추가되어 나오는데
진득하고 매콤한 두부조림 소스와 정말 잘 어울린다.
반숙으로 잘 구워진 계란 프라이를 터뜨려
스파게티와 함께 잘 비벼 먹으면 단백질로만 가득한 두부조림에 탄수화물이 더해져 소스가 아깝지 않게 먹을 수 있어 좋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스타일의 두부조림을 좋아하는데 이건 정말 집에서 해 먹어도 좋을 것 같은 조합이 아닐 수 없다.
한국식 소면이나 칼국수 보다 스파게티였기에
더 잘 어울렸던 게 아닐까 싶다.
이날 먹은 두 가지 메뉴 중에는 냄비 두부조림이 단연 최고의 술안주였다.
2명이서 방문해 다양한 메뉴를 맛보지는 못했지만
왜 낮술의 성지로 불리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4명 이상이 방문해서 더 다양한 음식과 다양한 술을 즐겨보고 싶다.
콜키지도 된다고 하니 정말이지 낮술의 성지로 손색이 없다.
사실 이곳 지하식당은 앞서 얘기한 '노포'가 아니다.
자료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2021년 이전의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
이제 햇수로 3년 차 정도 된 것으로 보인다.
중년의 사장님은 요리사 출신도 아니고 직장을 다니셨던 분이다.
메뉴의 구성이나 운영 방식만 봐도 요즘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노포 이야기로 지하식당 소개를 시작한 것은
나도 모르게 이곳을 방문했을 때부터 '괜찮은 노포를 찾았다'라고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업력이 오래되진 않았지만 오래된 전통 시장 속에 위치해
허름하고 허술한 공간이 더 힙하게 느껴진다.
노포에 대한 조건이 굳이 법적 기준이 아니라면
나는 여기 지하식당도 노포라 부르고 싶다.
노포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술맛 나는 분위기.
와인이 있지만 소주가 더 끌리는 그런 공간.
노포인 듯, 노포 아닌, 노포 같은 곳.
지하식당은 내게 그런 매력적인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