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뜨끈한 콜라 May 08. 2024

동아시아 삼국의 인물론④ -린통 홍문연의 유방과 항우

홍문연 鸿门宴의 유방과 항우

린통구(临潼区)는 도심으로부터 북동쪽에 있는 교외 지역으로, 비교적 최근인 1983년에 시안시에 편입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개편은 1979년 개관한 병마용 박물관과 관계가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외지인에게 무명에 가까운 웨이난(渭南)시 보다 이미 역사 도시로 명성이 자자한 시안시가 병마용의 역사적 상징성과 위상에 더 어울린다고 본 것이 아닐까요?


고대의 린통은 제국의 수도에 진입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이자 군사 요지였습니다. 수많은 군마들이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한 한무제, 수양제, 당태종의 병사들도 이곳을 거쳐 먼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관중 지방은 당나라가 멸망하는 서기 907년까지 이천 년 동안 세상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관중의 일부였던 린통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여럿 있습니다. 신석기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 중 가장 보존이 잘되어 있다는 강채유적(姜寨遗址, 비공개), 서주 마지막 왕 유왕이 미녀 포사를 웃게 하려고 불을 피워 제후들을 소집했다는 봉화터, 진나라 시황제를 사후세계에서도 지키기 위해 건설한 병마용갱(兵马俑坑), 당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욕을 즐겼던 화청궁(华清宫), 동북군 장학량이 장제스를 구금한 사건(즉 시안사변)이 벌어진 병간정(兵谏亭) 등이 그곳입니다. 대부분 여산(骊山)의 산자락에 펼쳐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린통에는 유방과 항우(BC232-BC202)가 살벌한 연회를 즐겼던 홍문연(鸿门宴) 터가 있습니다. 초한지(楚漢志)는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라는 두 영웅이 천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이야기를 다룬 연의소설인데, 초한지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가 이곳 홍문연 터에서 펼쳐졌습니다.

      

홍문연 에피소드는 두 인물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방(BC247-BC195)과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공략하기 위해 각자의 병력을 동원하여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끝내 먼저 함양을 차지한 자는 유방이었습니다. 항우는 유방이 얕은 수로 자신의 공적을 가로챘다며 분노하였습니다. 그렇게 항우의 40만 정예 병력은 유방의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번개처럼 당도하여 홍문에 진을 치게 된 것입니다.     


군사적으로 절대적 열세에 있던 유방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결사항전? 아닙니다. 자존심 없는 그는 홍문으로 쪼르르 달려와 비굴한 자세로 읍소하면서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참모들의 계속된 강권에도 불구하고, 항우는 마음이 풀어져 유방을 용서하여 살려주고 말았습니다.      


만약 범증이 유방을 죽이자고 눈빛을 보냈을 때 못 이기는 척 묵인하였더라면 중원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은 가정일 뿐이고, 천하를 통일하고 400년 역사의 새 왕조를 개창한 이는 바로 비굴했던 유방이었습니다. 천하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한나라 창건은 그 자체로 업적이라 할 만하고, 그렇게 세워진 한나라는 이후 역대 왕조들에게 대대로 긍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홍문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본다면, 항우의 선택은 매우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중을 차지한 자 천하를 얻는다(得关中者得天下)”는 말이 있을 정도의 관중의 상징성을 그는 간과한 셈입니다. 그가 진지했더라면 관중과 엮이기 시작한 유방을 살려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중을 평정한 자라는 명성은 이후에도 내내 유방에게 막대한 자산이 되어주었습니다. 나아가 천하통일의 밑거름이 되어주었습니다. 빌보드 핫100챠트 1위에 이름을 올린 BTS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한 번의 1위만으로도 BTS는 이미 세계적인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하고, 심각한 사건사고가 없는 한, 앞으로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을 것인데, 이와 마찬가지일 터입니다.


한고조 유방은 그렇게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성군이라는 명성을 누렸으나 제는협잡꾼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후대의 조조에 비견될 수도 있을 것인데, 조조에 비해서도 한참 비루한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비루한 인간이기만 하였다면, 결국 항우를 이기진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승리자가 될 자질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판단력이 좋아 임기응변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때때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필요하면 마치 현자인 듯 절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의롭지 않았으나 의로운 척할 수 있었으며, 겸손하지 않았으나 겸손한 사람인 척할 수 있었고, 탐욕스러운 자였으나 사심 없는 사람인 척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자들을 데려다 쓰면서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그들에게 완벽한 자율권을 주었습니다. 속으로야 그들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불신하였을지라도, 겉으로는 그 질투심과 불신을 완벽히 숨길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신, 소하, 장량 같은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기꺼이 자신을 따르게 하였으며, 결국 그들의 역량을 기초로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특히 유방이라면 역사를 자기 입맛에 맞게 윤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진시황과 항우에 대한 악담에 가까운 기록(예를 들어 항우가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생매장하였다는 신안 대학살 등)을 일단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온전히 신뢰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꾸며진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로부터 이들은 공식적인 역사와 상관없이 유방 보다 항우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사마천이 제왕이 아닌 항우를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수록하였다는 점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항우가 그저 악인이라고만 생각했다면, 사마천은 항우를 제왕으로 대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힘이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정도라는(力拔山气盖世)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의 인간적인 매력에 빠진 이들은 이후로도 많았습니다. 패왕별희(패왕 항우와 우희의 이별을 그림)라는 경극이 인기를 끈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땅의 선비들도 항우를 좋아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

실록에 따르면 세조 이유는 1460년 과거시험에서 입격한 최자빈(崔自濱), 이맹현(李孟賢), 임맹지, 신숙정의 4인을 불러 역학계몽, 중용, 소미통감 등에 대해 강론하게 한 다음, 그 중 최자빈과 이맹현의 실력이 출중한 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한나라 고조와 항우 가운데 누가 정대하였던가?”  

   

이맹현은 대답하기를 “한나라 고조가 정대하였습니다.

     

최자빈이 대답하기를 “항우가 정대하였습니다.”   

  

세조가 이를 듣고 나서 이맹현의 대답이 옳다고 하면서, 문과에서 이맹현 등을 급제자로 선발하였습니다.

------------     


시절 사법시험 3차 시험이 생각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법시험법 제8조 제3항은 제3차 면접시험은 ‘법조인으로서의 국가관, 사명감 등 윤리의식등을 평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면접관들은 “우리 군의 주적은 누구인가?”, “야당 정치인 OOO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가보안법은 폐지하여야 하나?”, “미군 철수에 대해 동의하는가?”, “반미정서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하였다 합니다.     


저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권력자들이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뻔히 아는데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었을까요? 내 생각이 그들의 정답과 달랐다면 정말 고민하였을 것 같습니다. 저와는 달리 비굴할 수 없었던 선배들은 양심이 시키는 대로 답변하고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한나라 고조가 정대하였다” 나라의 공식 입장에 부합하는 답이었을 테니,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급제를 원했다면 최자빈도 그렇게 답하여야 했습니다. 진솔한 사람이었던 탓에 그는 보직을 받지 못하고, 성균관으로 돌아가 유생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는 세조가 죽고 난 후 그의 손자인 성종 대에 이르러서야 경연관으로 제수될 수 있었습니다. 세조 자신은 쿠데타로 집권하였지만, 신하들은 고분고분하기를 바랐던 것이겠지요. 최자빈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종은 그의 명석한 강론을 기억하고 특별히 종이와 곡식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불이익을 무릅쓰고 사상검증 질문에 진솔하게 대답한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싶습니다.  최자빈(崔自濱)      


홍문연 유적은 병마용갱에서 멀지 않으므로 가시는 김에 한 번 들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딱히 잘 꾸며둔 곳은 아니어서 적극적으로 권해드리긴 어렵지만, 초한지의 애독자라면 방문의 가치가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린통은 온천으로 유명한데,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부터 국민당 총통 장제스까지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즐겼습니다. 지금은 화청어탕호텔(华清御汤酒店)이나 반얀트리 체인의 열춘호텔(悦椿酒店) 같은 온천 호텔들이 화청궁 인근에서 소소하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호텔들을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관광지들을 돌아보는 것도 동선 효율상 괜찮으며, 근처에 아울렛이 있어서 옷이나 운동화 쇼핑하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동아시아 삼국의 인물론③ 이순신, 원균, 선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