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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Nov 21. 2023

당나라 정치·외교 1번지를 찾아서 – 대명궁에 가다 ②

668년 함원전의 고구려 항복예식

668년 함원전의 고구려 항복예식      


남쪽에서 바라본 함원전


대명궁에서 가장 눈여겨볼 전각은 이 궁궐의 정전인 함원전(含元殿)입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길 바라면서, 이곳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 보았으나, 저는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외계어처럼 들리는 지 영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큰 아이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것 같더니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사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날씨가 풀릴 때를 기다려 큰 아이를 데리고 다시 함원전 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다리가 매우 아팠던 날이었다는 기억만 아이에게 남겨주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과욕이 이렇게 유익하지 못합니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은 보장왕(寶藏王)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 부여의자가 시호를 남기지 않아 그를 그저 이름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같은 이유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그도 그저 보장왕이라 부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군사쿠데타의 주모자인 연개소문의 꼭두각시였습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영류왕의 조카인 고보장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였기에, 왕이 되었을 뿐입니다. 연개소문은 당에 유화적이었던 영류왕과 달리 강경일변도의 정책을 폈고, 보장왕은 국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망국의 무게는 그가 짊어져야 했습니다.     


보장왕은 668년 12월 이곳 함원전에서 무릎이 꿇려진 채 황제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함원전에 3단의 월대가 복원되어 있지만, 당시의 전각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월대에 올라 다시 공상해보았습니다. 고복남, 남산, 남건 등 주요 포로들은 보장왕과 함께 이곳 어디쯤 북쪽을 바라보며 줄 맞춰 엎드려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시 포로 중 한 명이었다면, 나도 여기 어딘가에 그들과 함께 엎드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너도 여기 있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글쎄요, 이렇게 넓은 곳을 걷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앉을 수 있어서 좋았을 것 같아요”     


“나라가 망했는데, 기분이 별로이지 않았을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닐까요?”    


함원전의 월대 위에서 바라본 대명궁 정문 단봉문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는 668년 가을 장군 고요묘, 승려 신성 등이 제 나라를 배신하고 평양성 문을 열어 당나라에 항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04년 역사의 고구려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심지어 북상하던 신라군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원정은 속전속결로 끝났습니다.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 일으킨 작은 내분이 700년 국가 존망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보장왕을 사로잡았다는 보고를 들은 당고종 이치는 대장군 이적(李勣)에게 명하기를 포로들을 장안으로 바로 압송할 것이 아니라 대명궁 북서쪽 57km의 소릉(昭陵)으로 먼저 가라고 하였습니다. 보장왕은 그렇게 소릉에 누워있는 당태종에게 사죄해야 했고, 다시 장안의 대묘 즉 종묘로 끌려가 황실의 조상들에게 대죄해야만 했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잠들어 있는 소릉(昭陵)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함원전의 황제 앞에 무릎이 꿇려지게 된 것입니다. 황제는 죄를 지은 자는 연개소문이니 허수아비 보장왕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장왕을 요동 도독에 제수하고 조선왕으로 봉한 다음 옛 고구려 땅으로 돌려보내겠다 하였습니다. 이는 물론 관대한 처분이긴 하지만, 황제 입장에서도 그가 동요하는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다독이고 지역을 안정시켜 주길 바라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장왕은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연개소문에 의해 억지로 옹립되었지만, 보장왕은 망국의 운명을 끝까지 거부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요동 땅에서 흩어졌던 말갈인들을 모아 고구려를 재건하려 시도했고 거사는 발각되었으며 다시 장안으로 압송되었으며 정죄되었고 유배지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백제 태자 부여융의 길     


고구려의 멸망을 살펴보았으니, 백제에 대해서도 살펴볼 차례입니다.     


고구려보다 8년 먼저 멸망한 백제의 태자 부여융은 보장왕과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사비성에서 만여 명의 병사를 잃었으나, 웅진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었고, 결사 항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웅진방령 예식진의 갑작스러운 배신으로 포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정방은 사비성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를 크게 열고,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을 대청마루 아래에 꿇어앉히고, 김춘추, 김법민, 김유신에게 술을 따르게 하면서 모욕을 주었습니다. 신라 태자 김법민은 백제 태자 부여융에게 침을 뱉고 모욕을 주면서 마음만 먹으면 오늘이라도 너를 죽일 수도 있다며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물론 당나라 황제의 동의 없이 패전국의 태자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의자왕, 태자 부여융 및 만여 명의 백제 백성들은 바다를 건너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당시 당고종 이치가 머무르고 있던 낙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장안의 대명궁이 완성되기 이전이었기에 낙양으로 압송되었던 것이라 저는 추측합니다. 의자왕은 살아서 낙양에 도착하였으나 그 과정이 힘에 부쳤는지 항복을 거부하여 살해당했는지 어쨌는지 도착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황제는 태자 부여융을 처벌하지 않았고 웅진 도독에 제수하여 옛 백제 땅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부여융은 당나라의 신하로서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당나라로 복귀하여 여생을 무난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군을 이끌며 끝까지 싸우려 했던 동생 부여풍과 다른 삶을 살았고, 모진 수모 견디고 고국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려 했던 보장왕과도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로서는 부여융보다는 부여풍과 보장왕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옛날 일이라 그런지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쓰럽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부여융과는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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