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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Nov 24. 2023

당나라 정치·외교 1번지를 찾아서 – 대명궁에가다 ③

함원전의 이른바 석차논쟁

한국과 일본의 숙명 - 함원전에서 벌어진 이른바 석차 논쟁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필연적으로 충돌한다는 한반도의 지정학은 우리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훌쩍 광야로 떠날 수 있다면 모르겠으나, 지리적 조건도 시대적 상황도 그런 도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을 만큼 항공 기술이 발전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 지정학은 우리를 계속 괴롭게 할 것입니다. 애초 단군 할아버지가 입지 선정을 잘못하셨다고 한탄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우리는 이 터전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언변이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듣다 보면 그의 해박한 지식과 스토리텔링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업 시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꾸중하실 때마다 하시던 말씀 때문에 차마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역시 조선 놈들은 안돼. 미개한 놈들이라 쥐어 터져야 정신을 차려.’      


조선은 이미 사라진 역사 속의 나라이기도하고, 아무리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셨다고 해도 일본인이신 것도 아닌데, 선생님은 어떻게 저런 말씀을 하시게 되었을까요? 우리 민족은 열등해서 폭력적으로 질책해야만 비로소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참혹한 생각은 대체 누구에게서 물려받으신 것일까요?      


저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사실상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학생이 되어 전철을 타고 영풍문고와 교보문고에 가서 다양한 역사 도서를 읽어볼 수 있었고, 그제야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사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부득이 중국 또는 일본의 사서를 참고할 수밖에 없는 역사학자들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일본 육국사 원문의 일부를 읽어보게 되면서 저는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육국사의 두 번째 역사서인 속일본기 제19권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대명궁 함원전에서 벌어졌다는 신라와 일본 사이의 이른바 석차 논쟁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756년 1월 30일 부사 대반숙니고마려가 당에서 돌아왔다. 고마려가 보고하기를 “753년 정월 초하루에 당의 백관과 여러 조공국에서 온 사신들이 신년하례를 하였습니다. 천자(당현종)는 대명궁 함원전에서 새해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날 일본 사신의 자리는 서반의 제2위로서 토번국 뒤인데, 신라 사신의 자리는 동반의 제1위로서 사라센 제국의 앞에 있었습니다. 내가 당나라 장군 오희실에게 항의하기를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라가 일본에 조공한 것이 오래되었다. 지금 신라는 동반의 상석에 있고, 일본은 반대로 그보다 하위에 있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장군 오희실은 내가 수긍하지 못하는 안색을 보고, 바로 신라 사신을 서반의 제2위 석차인 토번국 뒤로 보내고, 일본 사신은 동반의 제1위인 사라센 제국의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절차와 형식이 중요한 외교 행사에서 일본 사신의 말만 듣고 신라 사신에게 갑작스레 뒤로 가라고 한다? 저는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의전 담당자가 신라 사신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렇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신라와 당나라는 매소성 전투(675), 기벌포 전투(676) 이후, 한동안 긴장 관계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성덕왕이 재위했던 735년에는 양국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753년의 당나라가 일본의 무리한 의전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객사도(예빈도): 당나라 태자 이현(李賢, 654∼684)의 묘에 그려진 신라사신. 우리 조상들은 모두 조우관을 즐겨 썼다. 2022. 5.26. 촬영


이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아닌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신경 써서 살펴봐야 할 것은 예로부터 신라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는 그들의 인식입니다. 역사학자 연민수 선생님은 이 에피소드가 ’신공황후 신라정벌설화가 당대 일본지배층의 신라관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즉 이미 당시의 일본인들은 신라를 속국 취급하며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공황후 설화라는 것은 환웅이 곰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만큼 황당한 이야기인데,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라도 여러 사람이 동시에 믿으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역사공정도 하는 것이겠지요. 신공황후의 전설에 역사적 신빙성을 더하기 위하여, 이 같은 에피소드를 속일본기에 사후 추가한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연민수 역주 속일본기. 비전공자로서 속일본기의 원문을 읽으려다 보니 쉽지 않았다. 감개무량하게도 이제는 우리 말로 이렇게 쉽고 편하게 고대 일본의 역사서를 읽을 수 있다


일본의 사서들은 유독 신라에 대해서만 이상하리만치 비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및 발해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라 사신이 다른 나라가 바친 공물에 손을 대었다던가, 신라 사신이 예법을 몰라 공물의 항목을 적지 않고 수량만을 제출하였으므로 꾸짖어 주었다던가, 신라 사신의 예의를 따르지 않아 본국으로 쫓아냈다거나 그런 식입니다. 발해 사신의 경우 아무리 그가 안하무인으로 행동해도 그를 무례하다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당시 일본의 이와 같은 유독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백제 유민으로부터 기원하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살펴볼 것인데, 어쨌거나 안타까운 점은 신라에 대한 이런 폄하적 태도가 이후 한반도인에 대한 폄하적 태도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내려왔다는 점입니다. 멀게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부터 가깝게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까지 그러한 태도가 확인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임진왜란 때 현해탄을 건너온 무사들 중 조선땅에 신공황후 통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온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정한론의 주창자인 요시다 쇼인은 신공황후 설화를 언급하면서 과거에 일본에 신속했던 조선이 오만해졌으므로 이를 원상태로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조공국이 조공국 노릇을 하지 않아 감히 천황께 무례를 범하고 있으니 이 무례를 바로잡기 위해 무력 행사도 불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은 막부 체제 내에서 결국 좌절되지만, 그의 사상은 이후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등에게 계승되었고, 결국 1875년 운요호를 동원한 함포외교로 현실화되고 말았습니다.      


시바 료타로는 ‘료마가 간다’ 등의 소설로 한국에도 애독자가 많은 소설가입니다. 그는 1976년 한국의 농촌을 여행하고 난 후, 조선인은 자신의 의사와 힘으로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능력이 전무하므로 외부로부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거나, 한국의 낙후는 일본 통치 36년 때문이 아니라 조선 500년이 만들어 낸 한국인의 생활의식, 규범, 습관 때문이라는 취지의 글을 쓰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명시적으로 그렇게 밝힌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사실상 (일본인에 비하여)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인식이 한국과 일본을 둘러싼 끈질긴 숙명을 만들어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미움과 갈등 아래 살아야 할까. 일본의 지도층이 신공황후 이야기를 역사가 아니라 그저 설화일 뿐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어려우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들과 우리의 숙명은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던 일본인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공자께서도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중에 스승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三人行必有我師), 일본의 훌륭한 점은 솔직하게 칭찬하고, 겸허히 배우고 본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역시 일본인들은 대단해. 한국 놈들은 안 돼. 미개해. 혼 좀 나야 해.’라는 식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말하는 한국 사람은 부디 없길 바랍니다.     


함원전을 내려오면서, 한국과 일본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이런 숙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물론 어렵겠지만, 진심으로 진심으로 희망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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