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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ormebadd Sep 28. 2023

오줌싸개 복사

 

1974년경, 우리 가족은 부모님의 직장문제로 인해 당시 살고 있던 “제주시”에서 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한림”이라는 읍단위의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많은 낯선 환경에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던 기억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한림에서 살았던 1년여의 시간은 내내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는데 그런 연유로 “한림성당”에서의 신앙생활은 가족의 중요한 일상이었다.

그러던 중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복사”라는 명칭의, 미사를 드리는 도중 신부님을 보좌하는 작지만

소중한 역할에 도전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아직도 첫 복사를 수행하기 위해 어느 겨울새벽 차가운 공기와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성당을 향해 걸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낯선 분들을 위해 설명을 조금 덧붙이면 영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토토가 어린 꼬마 시절 신부님

옆에서 보여주는 역할이 복사이다. 딱히 정해진 조건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에 복사역할을 배우고 시작하는 게 암묵적인 관행이었다. 복사 역할의 마무리는 보통 중학생

정도에서 했었고 길게는 고등학생까지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시네마 천국" 중 미사 도중 졸고 있는 복사 토토

아무리 어린 초등학생들이 하는 역할이라지만 그 규율과 사명감이 지니는 무게감은 상당한 것이었고

더욱이 파란 눈의 거구이셨던 아일랜드 출신 신부님 옆에서 미사 의식을 실수 없이 보좌한다는 것은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었다. 물론 별문제 없이 미사를 마친 후 느끼는 성취감은 지금 나이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절대 여느 어른들의 것에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름 복사로서의 경험이 쌓여가고 자신감을 넘어 “난 참 훌륭한 복사인 것 같아”라는 어처구니없는 생애

최초의 자만감에 취해 갈 즈음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한림”자체가 읍단위의 작은 동네였으므로

그 주변에 위치한 동네들은 규모들이 더 작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까닭에 당연히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성당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동네의 신자분들의 신앙생활도 다 소중한 것이었기에 그런 분들을 위해 성당보다는 훨씬 작은

공간이지만 “공소”라는 장소가 마련되어 정해진 요일마다 신부님과 나는 그분들과의 미사를 위해 공소를

방문했었다. 임시방편 성격의 공간이었던지라 공소 바닥은 신발을 신은 채로 입장하는 허름한 먼지투성이의 마룻바닥이었고 전체적인 크기는 대략 일반 식당 정도의 조그만 크기였다


문제의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사 준비를 하고 드디어 공소에서의 미사가 시작되었다.

순탄하게 미사 의식의 중간 정도가 진행되었을 때쯤 불안한 생리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소변이 마렵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잠시 후 벌어질 참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어느덧 미사는 중후반으로 접어들었고 드디어 미사의식 중 가장 중요한 파트라고 할 수 있는 영성체 의식 차례가 되었다. 영성체는 신부님이 밀떡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의식인데 나는 영성체 동안 동그랗게 생긴 조그만 쟁반을 들고 밀떡을 나누어 주시는 신부님의 손을 경건하게 받치고 있어야 하는 역할이었다. 사고는 그때 터졌다.


참을 만하던 소변이 걷잡을 수 없이 마려워지기 시작하며 통제 불능의 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하고 만 것이다. 영성체 의식은 이미 시작된 터였고... 앞서 얘기했듯이 불타는 사명감과 훌륭한 복사라는 착각에 사로잡혔던 나는 절대 쟁반을 내려놓고 급히 소변을 보기 위해 공소를 뛰쳐나갈 수는 없다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생리현상을 이겨내는 초능력이 발현하는 기적 같은 건 없었고 나는 안절부절 다리를 꼰 채로 쩔쩔매다 결국에는 그냥 선채로 소변을 보고 말았다.


어른이 된 후 종종 그때 일을 떠올리며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 봤지만 매번 결론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왜 그 일을 여태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때 미사에 참석하신 스무 명 남짓한 신자분들의 영성체가 끝난 후 내가 서 있었던 나무바닥 자리는 이미

소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내 복사의복의 끝자락에도 소변의 흔적이 역력한 상태였다.

“이건 분명 꿈 일거야”라는 수준의 후회를 하며 부끄러워 고개조차 잘 못 들고 있던 나였지만 그 와중에도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공소”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황당한 만행을 목격했을 터였지만 신부님을 포함해서 그 어느 누구도

화를 내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웃지도 않으시며 바닥에 흥건한 소변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미사의 마무리를 진행한 것이다. 나 또한 선택의 여지없이 조용히 복사 역할을 끝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의 행동은 마찬가지였는데 그 어느 신자분도, 심지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의

신부님도 “왜 그랬니?’ 하는 질문이나 질책 같은 건 전혀 없으셨다. 차 안 시트에도 소변 흔적이 역력했음에도 말이다… 집에 돌아온 나에게서 범죄자백 수준의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님조차도 그냥 웃기만 하시더니

별다른 말씀 없이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셨다. 그게 다였다.


나는 왜 모든 어른들이 그 상황에 대해 아무런 반응들을 안보이셨는지 당시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합리적인 이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만한 정신 연령대도 아니었을뿐더러 그런 일이 그저 부끄러운 그냥

어리고 어린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어른의 눈과 마음으로 이해하기까지에는 그 후로 대략 2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디어 어른 흉내를 낼 만한 정도가 되어서야 말이다.


물론 나의 그 이해라는 것이 정확한 답이라고 지금도 자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었다.


그분들은 그 상황 자체를 마치 없는 일처럼 무시함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과 배려를

나에게 베풀었다고 말이다. 여리고 작은 꼬맹이가 자책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이 나를 감싸 준거라고 말이다.


나이 탓인지 가끔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단순히 이해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감동 그리고 또 감동이 매번

나의 기억에 얹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한다. 그분들처럼 선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들을 배려하며 잘 살아왔는지? 잘 살아가고 있는지.. “그래. 나는 노력했어 “라고 슬그머니

자위해 보기도 하지만 솔직히는 잘 모르겠다는, 아니 그렇게 못 살아온 거 같은 자책과 후회가 더 크다는...


그“오줌싸개 복사”가 어느덧 50 중반을 훌쩍 넘긴 노년의 어른이 되었다.

세상은 항상 그렇듯 어려운 존재감으로 나와 마주해 있고 여전히 많은 혼란스러움들로 나를 흔들어 댄다.

그런 흔듬에 쉽사리 휘둘릴 수는 없기에 나는 전력을 다해 버티어 본다.

가족 친구 같은 측정 불가의 소중한 것들이 그 버팀의 중심에 나와 함께해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치열한 부딪힘에 부득이 내가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된다면

그 누군가가, 그 무엇인가가, 오래전 “오줌싸개 복사”를 위해 베풀어졌던 그 따뜻함 속으로 다시 한번

나를 이끌어주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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