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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공지능에게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을까

<넥서스>, 유발 하라리

by 이상균
<넥서스>를 다 읽는 데는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내용은 쉽지만 기본적으로 6백 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고, 사료들의 밀도도 높다.


유발 하라리의 신작 <넥서스>를 다 읽었다. 이 책은 맥락상으로는 <호모 데우스>의 연장선에 있다. <호모 데우스>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 먼 곳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조망하며 읊조리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면, <넥서스>는 말투는 그에 비해 매우 급박하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하라리가 예측했던 미래가, 그의 기대보다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IMG_0155.jpeg <사피엔스>는 너무 좋은 책이어서, 읽지 않았다면 꼭 일독을 권한다.


<넥서스>에 담긴 얘기를 하기 전에, 유발 하라리를 슈퍼스타로 만들어주었던 책, <사피엔스>에서 그가 했었던 주장을 되짚고 가보도록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10만여 년 전의 지구, 빙하기의 끝자락에 있었던 지구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사하라는 사막이 아니라 초목이 우거진 사바나 평원이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공통 조상, 우리와 같은 종인 사피엔스는 그곳에서 탄생했다.


사피엔스는 지구의 유일한 인간 후보가 아니었다. 흔히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서 사피엔스가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최소한 여섯 명의 사피엔스의 형제들이 지구에 곳곳에 살았다.


유럽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커다란 덩치에 단단하고 두꺼운 몸통과 근육으로 뒤덮인 팔다리, 잘 부러지지 않는 두꺼운 뼈를 가졌다. 반면 사피엔스는 왜소했고, 뼈는 가벼웠으며, 팔다리는 얇고 길었다.


만약 초원에서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가 일대 일로 목숨을 건 대결을 해야 했다면 육체 능력에서 월등히 우위를 점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이 사피엔스를 압도했을 것이다. 실제로 약 10만 년 전 사피엔스의 일부가 네안데르탈인의 영토인 지중해 동쪽으로 진출했다가 자리를 잡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 고고학적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놀랍게도 사피엔스에 의해 멸종당했고), 사피엔스는 홀로 지구에 살아남아 현생 인류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네안데르탈인 소년의 상상도. 네안데르탈인은 금방에 푸른 눈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처 제공.


유발 하라리의 설명은 이러하다. 사피엔스에겐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다른 사촌들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 개념을 공유하는 능력이었다.


“저 언덕 너머에 우리의 적(敵)이 있다!” 사피엔스는 이렇게 우리라는 개념, 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와 '적'은 매우 관념적인 개념이다. 자연 상태에는 적이 없다. 사바나의 사자는 가젤을 적으로 생각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먹이를 얻기 위함일 뿐, 사자는 누군가와 대결하거나, 복수를 하거나, 명예를 지키거나, 특정 종족을 정복하기 위해 사냥을 하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우리의 형제들인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플로레스인 등은 이러한 개념을 생각해 내는 능력이 없거나 부족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피엔스는 이러한 능력을 이용해 종족 전체가 하나로 단결할 수 있었다. 단결한 사피엔스는 우리가 아닌 적으로 규정된 형제들을 하나씩 살해해 나갔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플로렌스 인들은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사바나의 모든 코끼리 집단이 사자 개체들을 모두 '적'으로 규정하여 집단적으로 함께 공격한다면 사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자들은 한 마리씩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다. 씨족 단위 이상으로 결집할 수 없었던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과, 플로렌스인 등의 개별 개체들은 하나씩 사피엔스 집단에 의해 소멸했고,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 지구상 유일한 인간 종족이 되었다는 것이 하라리의 설명이다.*


이러한 사피엔스, 즉 우리를 가리켜 유발 하라리는 '형제 살해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어떻게 이러한 개념들을 공유할 수 있었던 걸까? 하라리는 개념 자체가 공유된 것이 아니고, 이야기, 즉 허구와 그 허구를 믿고 공유하는 능력이 사람들을 연결시켰다고 말한다.


14억 중국인들은 마오쩌둥 신화와 공산주의가 가져올 중화(中華)의 영광을 믿는다. 중국인들은 이 이야기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피부 색도, 언어도, 향유하는 문화도 모두 다르지만, 전 세계의 가톨릭 교도들은 <성경>으로 연결되어 있다.


IMG_0157.png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 취임선서를 마치고 카이저호프 호텔을 떠나고 있다.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제공.


수백만명의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된 것에는 1930년대 초의 경제 위기가 물론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히틀러가 1933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인들이 독일인은 아리안이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 1차 세계 대전의 패배는 독일 국민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배신 때문이었다는 것, 우리들의 조국은 약탈당했으며, 영광을 되찾기 위해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로 수백만명의 독일인들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사람들을 연결시킨다. 이 연결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유통된다. 이것이 위에서 얘기한, 형제 살해자로서 사피엔스 고유의 특성이며 능력이다. 하라리는 연결을 가리켜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넥서스(Nexus)로 명명한다. 그리고 넥서스, 사피엔스의 개별 개체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능력, 사피엔스를 지구의 지배종으로 만들어준 이 특별한 능력이, 이제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책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야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 내고,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라리는 이야기의 최소 단위는 바로 '정보'라고 말한다. 최초의 이야기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혹은 동족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남쪽 초원 멀리에서 사자 무리를 봤어. 당분간 남쪽 초원은 위험해. 그쪽으로 가지 마. 이야기를 만든 우리의 조상은 동굴 벽에 남쪽을 상징하는 쌍둥이 봉우리와 초원을 덮고 있는 갈대, 그리고 사자 세 마리를 그렸을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정보다. 남쪽 초원, 사자 무리, 가지 마. 우리는 넥서스를 통해 정보를 유통한다. 오늘 코스피 지수는 3천을 돌파했고, 낮 최고기온은 30도일 것이며, 저녁 8시에 축구 경기가 열린다. 이 모든 것들은 정보다. 우리는 정보를 소비하는 주체이자 유통하는 주체다. 우리는 손흥민의 골 장면이 담긴 릴스에 좋아요를 누르고, 고양이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고, 지지하는 정치인의 트윗을 리트윗 한다. 이렇게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이 남쪽 초원에서 사자 밥이 되는 것을 막았던 넥서스는, 이제 수많은 정보의 유통과 소비의 장으로 변모했다. 그런데 하라리는 넥서스가 대체 왜 위험하다고 하는 것일까?


하라리는 정보가 유통되는 형태, 즉 이야기의 본질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위에서 얘기했지만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허구다. 이야기는 진실에 관심이 없다. 즉 정보는 진실에 기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와 정보의 유통과정은 스스로 진실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회 질서의 유지이다.




우리는 위에서 이미 1933년 독일인들이 믿었던 허구에 의해 어떻게 나치 정권이 탄생했는지 보았다. 하지만 허구가 질서 유지의 기본 전략이었던 것은 아주 예전부터다. 러시아의 차르, 무슬림의 칼리프, 중국의 천자(天子)는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의 기본 규칙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로 시작하는 성경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십계명의 규칙이 신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다. 지동설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이론은 아마도 다윈의 진화론일 것이다. 진화를 공부하면 사피엔스를 포함한 다양한 종들의 기원과 생물학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신화(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화)가 흔들리게 된다. 많은 정부와 교회가 진화 교육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면서 질서를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정보의 유통 방식에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여전히 정보는 진실에 닿지 못한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쫓아낸 그 위대한 혁명이 담긴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는 초판 400부가 미처 다 팔리지 않았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발생한 정보 유통 혁명의 수혜자는 사탄 음모론을 담은 하인리히 크라머의 <마녀의 망치>(1486)였다. 크라머는 마녀들이 밤에 대규모 악마 집회를 열어 사탄을 숭배하고, 아이들을 죽이고, 난교를 벌이며 전염병을 부르는 주문을 외운다며, 이러한 마녀를 구별해 내는 방법을 자세히 적었다. 이 책은 16세기와 17세기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유럽 전체에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켰고, 4~5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마녀로 고발되어 고문과 처형을 당했다.


<마녀의 망치> 1669년판. 크라머는 1505년에 죽었다. 이 책은 그의 사후 15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베스트셀러였다.


인쇄술의 발명이 가져온 결정적 변화는 진실의 전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질서다.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보급하자 독일인들은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신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에게 사제를 통하지 않고서도 신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교회 권위의 붕괴와 종교 개혁이 도래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히 교리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보의 생산과 확산의 방식을 십분 활용해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넥서스>의 핵심 주장이다. 정보 유통의 목적은 진실의 전파가 아니라 질서의 유지이기 때문에, 정보 유통 방식의 변화는 반드시 기존 정치체제의 변화 혹은 붕괴, 그리고 새로운 정치체제 혹은 새로운 질서와 권력의 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정보 유통 혁명은 더욱 강력했다. 전신, 라디오, 신문, TV의 등장은 거리와 공간의 장벽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시민들은 매일 아침마다 세계 곳곳의 소식을 받아 읽었고, 정치권력은 국민 개개인에게 매일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시민들의 의견 교환 속도도 마찬가지였다. 편지나 전보의 속도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의견 교환 속도는 유선 전화의 속도까지 빨라졌다.


정보 유통 방식의 변화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등장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이 혁명으로 두 정치체제가 새롭게 등장했다. 한 정치체제는 양적으로 증가하고 속도면에서도 빨라진 정보를 그대로 분산 유통시켰다. 민주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다른 정치체제는 정보를 한 점으로 모으고 감시, 검열했다. 이 정치체제는 전체주의가 되었다.


전체주의가 민주주의가 무르익지 않았던 시대의 부산물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큰 오해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주의가 미래의 대세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주의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라이히슈타크(독일 제국의회 의사당) 건물 옥상에 붉은 깃발을 게양했으며, 중부 유럽부터 태평양 지역까지 뻗어 있는 제국을 통치했다. 세계 전역에서 반식민 투쟁에 불을 지폈고, 수많은 모방 정권을 탄생시켰다. 심지어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사상가들,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얻었다. 강제 노동 수용소와 숙청에 대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진보적 사상가들은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의 착취를 끝내고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인류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주의는 세계 지배에 매우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스탈린주의가 진실을 무시했다거나, 민중을 검열하고 감시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거나, 결국 실패했으니 다시는 그런 종류의 체제가 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것이다.


하라리는 스탈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구성원들의 심리적 비용과 효율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쓴다. 만약 언젠가 인류가 이 비용과 효율을 개선할 방도를 찾아낼 수 있다면 스탈린주의는 언제든 다시 인류를 지배하는 정치체제가 될 것이다. 하라리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국민들의 동의 없이도 안면 인식 기술 등 생체 정보를 이용한 대국민 감시 시스템을 국가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의 일부로 활용하고 있는 중국이 이미 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들 스스로가 경험한 정보화 혁명은 없는가? 없을 리가 있는가. 우리야 말로 정보화 혁명을 눈앞에서 목도했던 당사자들이다. 우리는 인터넷과 SNS의 탄생을 경험했다.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위치가 역전되는 것을 실감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다. 신문과 라디오, TV는 모두 단방향 매체다.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과 신문을 소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의 인터넷 세상은 그렇지 않다.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릴스와 숏츠를 올리고, 누구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할 수 있다. 나만해도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브런치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에도 뭔가 변했을 것인가? 이 글 내내 하라리와 나는 정보 유통의 방식이 변하면 질서의 기준이나 집권 세력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뭔가 변화와 사건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2010년대 초반 미얀마에는 수십 년간의 군부 통치가 끝나고 자유화 시대가 도래했다. 제대로 된 선거가 치러졌고 군부의 검열은 사라졌으며, 국민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다. 페이스북은 곧 미얀마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수백만 미얀마인들은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보의 자유를 경험했다.


미얀마 서부에는 로힝야족이라고 하는 무슬림 소수 민족이 살았다. 미얀마 인구의 90퍼센트는 불교도였는데, 이들은 이전에도 민족 간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2016~2017년 페이스북에는 로힝야족을 권리를 누릴 수 자격이 없는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묘사하는 가짜 뉴스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짜 뉴스들은 페이스북 알고리즘을 타고 미얀마 전역으로 퍼졌다. 그 결과 미얀마군과 불교 극단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로힝야족 전체를 겨냥한 전면적 인종 청소 운동이 시작되었다. 로힝야족 마을 수백 곳이 파괴되었고, 7천~2만 5천 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죽었다.


IMG_0160.jpeg 전복된 배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로힝야족. 학살 이후 이들은 난민이 되었다. 로이터통신 제공.


당연히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페이스북 경영진은 로힝야족에 대한 악의를 품기는커녕, 그들이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페이스북 경영진은 다만 페이스북 알고리즘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더 많은 좋아요를, 더 많은 댓글을 유도할 수 있는 글과 영상을 추천하라.'


페이스북의 사후 자체 조사에 의하면 로힝야족을 겨냥한 가짜 뉴스들은 70%가 자동 재생의 형식으로 시청되었다. 소수 민족을 향한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영상을 미얀마인들은 본인이 선택하여 시청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볼지 선택하지 않는다. 어떠한 정보를 새롭게 받아들일지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시대 정보 유통 혁명의 결과다. 인터넷과 SNS 때문에 도래한 새로운 시대에 우리는 페이스북과 유튜브,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선택한 영상을 강제로 시청하고, 알고리즘이 들려준 이야기를, 그들이 제공한 허구를 믿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의 <마녀의 망치>는, 히틀러의 연설문은, 더 이상 사람이 쓰지 않는다.




미얀마의 비극뿐만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는 <넥서스>에서 미국의 선거와 트럼프의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 코로나 19 기간 동안 세계적으로 확산된 음모론과 백신 불신 운동, 중국 신장 지역의 데이터 감시체제 등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적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 시대의 정보 유통 방식의 변화 때문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신권과 왕권이 국민을 겁박하는 방식으로 질서를 유지하던 시대를 지나, 정치인과 언론, 제도권과 교육이 국민을 계몽하여 질서를 전파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 데이터와 알고리즘, 빅데이터를 손에 넣은 집단 혹은 기계가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대한 하라리의 진단이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위협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알다시피 그것은 인공지능 시대의 등장이다.


인공지능이 연산과 예측, 데이터 해석, 행동 유도까지 도맡는 시대가 오고 있다. 지금껏 넥서스, 즉 정보 연결망의 주체는 인간이었다. 남쪽 초원에 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전파하던 시대부터 유대인 때문에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졌다고 얘기하던 시대까지, 어쨌든 허구를 만들어내고 전파하는 연결점에는 우리 인간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대는 그렇지 않다. 새롭게 등장할 넥서스는 유기적 네트워크가 아니다. 이제 정보의 생성과 유통, 해석과 대응의 모든 과정에 인공지능이 개입할 것이다. 인간은 처음으로 넥서스의 주인 자리를 기계에게 내어주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개인의 주체적 판단, 집단적 토론, 그에 따른 여론의 형성, 선거라는 과정이 빅테이터와 인공지능의 영향력 아래에서 의미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교묘한 가짜뉴스를 진짜와 구별해 낼 수 있는가? 당신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주체적인 판단 주체로서 당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인터넷에서 누군가와 의견을 교환할 때, 당신은 인공지능과 겨루어 그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물론 당신은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많은 사료와 교묘한 가짜뉴스, 어떠한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는 냉정함을 갖춘 인공지능과의 토론 후에도 당신의 신념과 지지정당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는 18~20세기의 정보 유통 질서(신문과 TV와 라디오)에 기초해 설계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정보 유통 방식이 등장하면 매번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했고, 새로운 집권 세력이 등장해 왔음을 지금까지 계속 지켜보았다. 넥서스가 비유기적 네트워크로 전복되는 완전히 새로운 정보 유통 시대에, 우리는 정말 19세기에 만들어진 정치 시스템인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하라리의 이 질문은 더 이상 먼 미래의 담론이 아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먼 미래를 관조하던 하라리는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그리고 우리의 코 앞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인공 지능 혁명이 코 앞에 도래한 시대에, 새로운 답을 찾아내는데 허락된 시간이 우리에게 결코 많이 남지 않았다고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2023년 3월, 인공지능 연구를 최소 6개월 동안 중단해야 한다는 공개서한에 일론 머스크, 스티브 워즈니악을 비롯한 2만 7천 명과 함께 서명했다.



정말 최소한으로 요약하려고 시작한 독후감인데, 정말이지 엄청나게 길어져 버렸다. 유발 하라리의 글쓰기는 미셸 푸코의 글쓰기와 비슷하다. 하라리는 형이상학적으로 세계를 기술하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많은 사료를 가져다 쌓아 놓고, 독자가 납득할 때까지 그 사료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 내가 꼭지마다 한 두 개씩 가져온 사료는 정말 최소한의 것이다. 나는 대표적인 인공지능 낙관론자였는데, <넥서스>를 읽고 나서는 내가 매우 순진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라리에게 설득되었다)


하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낙관론자이기 때문에 인류는 언제나 그랬듯 또 답을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인류가 모두 함께 직면한 이 도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넥서스>를 통해 꼭 한번 확인해 보기를 권한다. 긴 글을 마친다.




*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다른 인류의 소멸을 설명하는 학설에는 경쟁과 멸종 가설 외 교배와 융합 가설도 있다. 이 두 가설이 모두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상과학이다. 다만 나는 이 글에서 단순화를 위해 일부러 교배와 융합 가설을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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