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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방식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by 이상균


서울대 박찬국 교수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다 읽었다. 이 책은 하이데거 입문서인데, 실은 이번이 2독째다. 5년 전쯤, 이미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도 선생님의 하이데거 입문 강의도 함께 들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철학자들이 다 그러하지만, 하이데거는 정말 어렵다. 정말 무지하게 어렵다. 어려운 이유는 당연히 깊기 때문이다. 한 단계에서 A를 비판하는가 싶더니, 그 보다 더 깊은 이해에서는 A가 새로운 이해의 토대가 된다. 철학 안에서 계속 새로운 철학들이 변증법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지하 2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아래로 몇십 층의 하이데거가 더 깊은 곳을 향해 뻗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아득함을, 막막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지하 1층의 이해 수준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래층에서는 오해가 될 지하 1층의 이해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하이데거가 오래 매달린 철학소는 존재(存在)다. 이 철학소만큼 대중적인 철학소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존재한다'는 표현을 말하고 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서관 책상 위에는 내 노트북이 존재한다. 그 옆에는 커피가 담긴 빨간 텀블러도 존재한다. 이렇게 당연한 개념을 두고 하이데거는 묻는다. '존재란 무엇인가?' 이 어이없는 질문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이 궁금한 분이 있다면 아래의 글을 따라와 주면 되겠다. 늘 그렇지만 최대한 쉽게 쓸 것이다.




당신은 광산에서 이번 겨울에 쓸 석탄을 캐고 있다. 그런데 석탄과 자갈 사이에서 갑자기 반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곡괭이를 몇 번 더 내려쳤더니 황금빛을 내는 금속 덩어리가 나타난다. 금이다. 당신은 금맥을 발견해 낸 것이다. 당신은 뜻밖의 횡재에 곡괭이를 내던지고 환호한다.


그런데 당신은 방금 왜 환호했는가? 왜 기뻐했는가? 대답하기 민망할 정도로 당연한 질문이다. 황금은 비싼 금속이고, 당신은 이제 곧 부자가 될 테니까 기뻐한 것 아니겠는가?


이 당연한 장면에서 하이데거는 혀를 찬다. 비싸다는 것은 황금이 스스로 가진 속성인가? 아닐 것이다. 황금은 드물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비싸다. 즉 우리는 황금을 대상 그 자체로 대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우리와 황금은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욕구와 욕구 충족의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욕구로서의 주체와 욕구 충족 수단으로써의 대상의 구도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닭은 어떠한가? 우리에게 닭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닭이 아니다. 닭은 우리에게 달걀이나 치킨으로서, 즉 먹을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먹히는 것이 닭의 속성, 즉 본질인가? 적어도 여기에 닭이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닭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간에게 닭은 좁은 양계장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모이를 먹고 끊임없이 달걀을 낳다 닭고기가 되기 직전 몇 초만 빛을 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배터리 케이지 안의 닭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를 공격하기 때문에, 닭의 부리를 잘라낸다고 한다. ⓒ뉴스퀘스트, [사진=셔터스톡]


이제 비로소 하이데거의 의도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 인간과 관계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본래적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관계된 모든 사물들은 인간에 의해 용도가 정해진다. 닭과 소와 양을 고기와 가죽과 털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자원으로 대하는 인간은, 산을 광석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대하고, 나무와 숲은 공기를 정화하고 산소를 공급하는 자원으로 대하며, 바다는 휴가철에 우리에게 휴식을 선사하는 자원으로 대한다.


심지어 이 구도는 끝나지 않는다. 요구의 연결은 무한하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쓴다. "대지는 광석을, 광석은 우라늄을, 우라늄은 원자력을 내놓도록 강요당한다", 기뻐해도 좋다. 우리는 방금 하이데거가 직접 쓴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비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이번 가을 공채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당신의 부서로 배정됐다. 부서장인 당신은 신입사원의 빠른 부서 적응을 위해 김대리에게 멘토링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팀의 막내 역할을 하온 박주임의 업무를 신입사원에게 넘기고, 박주임에게 지금껏 구상해 온, 그러나 사람이 없어 시작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업을 맡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회사 생활을 하며 만나는 수많은 순간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시 욕망과 욕망의 해소 수단 구도를 가져다 댄다. 방금 당신은 신입사원을, 김대리를, 박주임을 본래적 존재로 대했는가?


아니다. 당신은 방금 그들을 당신의 욕구 해소 도구로 대한 것이다. 당신은 부서 전체의 생산성을 올려 그것을 성과로 연결시키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다음 분기에 더 높은 고과를 얻고 싶은 당신의 욕구의 해소 수단으로써 멤버들을 대한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그뿐이 아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이용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가족도 이러한 방식으로 대할 때가 있다. 어떤 엄마는 아들을 자기실현 수단으로 대하고, 어떤 아들은 아버지를 자기 사업 빚을 갚아줄 수단으로써 대한다. 잘 생각해 보면 많은 경우 이혼은 자신의 욕구 해소 수단으로써 배우자가 동작하지 않기 때문에 이뤄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사회가 그렇지 뭐, 이런 것까지 비판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면, 하이데거의 마지막 비판을 더 들어보자.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아침 지옥철을 견디고 사무실을 출근해서 오전엔 이메일에 답장을 하고 오후에는 두 개의 미팅을 진행했다. 요즘 체중이 좀 는 것 같아 점심으로 테이크아웃 샐러드를 먹었더니 저녁나절에 좀 출출하다. 야근을 한 시간 정도하고 퇴근하는 길에 컵라면과 편의점 도시락을 샀다. 집에 와서 TV를 켜니 무한도전 재방송이 나온다. 맥주 한 캔을 홀짝거리며 TV를 보다 당신은 잠이 들 것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은 왜 이러한 방식으로 사는가? 왜냐니 돈을 벌기 위해서 회사 다니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질문을 바꿔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을 본래적 존재로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면 당신은 방금 하이데거가 말한 경악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 산과 광석과 우라늄, 닭과 돼지와 양, 신입사원과 박주임만 도구인 것이 아니다. 당신은 실은 지금까지 늘 당신 자신을 도구로 대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당신은 본래적 존재가 아니다. 실은 당신에겐 당신이라는 대상마저도 당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하이데거의 질문을 이해했다. 우리가 지금껏 이해하고 있었던 존재는 전혀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수단, 혹은 도구로서의 존재였다. 인간과 관계한 모든 사물들은 물론이고, 우리는 우리와 관계하는 모든 인간들, 그리고 그것을 넘어 우리 자신까지도 실은 도구로서 대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깨달음, 산과 광석과 우라늄, 닭과 돼지와 양, 박주임과 우리. 모든 존재자들에게 고유한 존재가 떠나버리고 근원적 세계 또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철학을 할 순간이라고 말한다.


깊은 겨울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을 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다.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마르틴 하이데거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존재가 존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존재는 무엇일까?


하이데거의 대답은 놀라운데, 이러한 질문 자체가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하이데거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가 진화의 여정에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은 대략 6백만 년 전이다. 인류의 문명은 대략 5천 년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를 하루로 압축해 보면 인간의 삶 24시간 중 문명의 역사는 약 1분에 불과하다. 즉 인간은 23시간 59분을 동물로 살았다. 인간은 인간의 역사 대부분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싸우고 죽이고 짝짓기 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러한 점을 들어 진화생물학자들이나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은 100% 동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선택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침팬지들은 서열과 자원, 영역과 번식을 위해 서로 다툰다. ⓒYoutube Ape Tracker


물론 하이데거도 인간의 기본 욕구가 식욕이나 성욕이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꾀하고 번식을 도모하는 방식은 동물과 매우 다르다. 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파인 다이닝을 즐기고, 기껏해야 영역 싸움이 전부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타국의 도시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동물의 욕망이 현재여기에 묶여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인간과는 달리 동물에게는 과거와 미래도, 여기와 저기도 없다.


동물은 내일 잡을 사냥감에 대해 생각하거나, 어제 잃은 자신의 영역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먹을 만찬과 작년에 누락된 자신의 진급에 대해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동물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공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지렁이의 세계는 시궁창을 넘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가보지 않은 지구의 반대편은 물론이고 우리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우리 우주 바깥의 공간과 그 너머의 우주를 생각한다.


현재와 여기에 묶여 있는 동물은 그래서 고독감이나 무력감,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은 어제 먹지 못한 먹이를 아쉬워하거나, 미래에 실패할 사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은 욕구를 채우는 도구적 존재로서의 자신 이상을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는 식욕이나 성욕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고독감, 허무감,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를 만든다. 인간은 도구 이상의 무엇이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태어날 때 누군가에게 선택지를 받았는가? 태어날래, 안 태어날래? 이렇게 말이다. 터무니없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아무도 동의를 받고 태어나지 않았다. 세계는 우리에게 이미 도착해 있었다. 심지어 우리에게 도착한 세상을 우리는 조금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세상에, 동의도 없이 태어나 버린 것이다.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가 죽지만 그 죽음엔 이유나 명분이 없다. 악한 일을 행해서 죽는 것도 아니요, 경쟁에 패배해서 죽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죽는 데엔 아무런 이유나 맥락이 없다. 죽음의 사태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교통사고로, 누군가는 폐암으로, 누군가는 그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동의 없이 태어나 이유 없이 죽는 존재인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세계가 있어서 우리는 이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는가? 왜 나는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왜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고, 짜장면 대신 샐러드를 먹어야 하고, 단지 한 캔의 맥주만을 나에게 허락해야 하는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의미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 하고 묻는 존재다. 인간은 존재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존재다. 인간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즉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나, 이 존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現-存在, Dasein)라고 부른다.


이미지 1.png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현-존재는 실은 그저 하이데거 철학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의 특징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기존의 인식론은 존재의 본질에 접근했었는가? 수많은 후속 질문들이 이 질문의 뒤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다음 단계의 이해에서는 방금 했었던 얘기가 역전된다. 나는 마치 도구성을 전제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존재적이지 않은 태도인 것처럼 얘기했는데, 하이데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관념론의 핵심인 인식의 프로세스가 실은 도구로서의 세계에게서 도구성을 빼앗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형이상학적 서술로 이어진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매우 어렵고 심오한 개념이다. 내가 오늘 쓴 이 한 바닥 글은 하이데거로 향하는 시작점도 아니고, 그 시작점에 대한 소개에 불과하다.


언젠가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 주변을 읽고 나서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친다.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는 하이데거에 입문하는 아주 좋은 시작점이니, 하이데거를 읽어 보고 싶은 분들은 이 책으로 시작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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