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즐거움은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현인들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즐거움을 알고 있으면서 혹은 아예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하루하루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독서를 하지 않아도 당장 죽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의 양식을 쌓는 책읽기의 즐거움 보다는 감각적인 쾌락에 더욱 중독되어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독서의 즐거움에 한번 빠진다면 이것은 마치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어떤 중독보다도 감미로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는 취미를 “독서”라고 말한 적이 많았다. 그냥 시간이 남을 때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듯이 심심하니까 소위 “킬링타임”의 용도로 독서를 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남들한테 잘난 척 하기위해서 소위 “현학적 허세”로써 독서를 한 적이 있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책을 끝까지 읽기까지 매우 지겹고 따분하고 끝까지 읽었는데도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자기가 써먹기에 필요한 내용 몇 줄을 배우가 대사를 외우듯 암기할 뿐이었다. 이러니 정작 그 책에서 배워야할 저자의 진정한 이야기는 이해하지 못하고 수박의 겉만 조금 핥아가 그만 두는 모양새가 대부분이었다.
독서는 체계적이고 집중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한다. 취미로 읽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읽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배울 것이 있고 깨우쳐 나가는 것이 있다. 연예인 화보집 보듯 설렁설렁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독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운동선수가 대회를 준비하듯, 군인이 전투를 준비하듯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은 최소한 중학교 때부터는 시작하여야 한다. 어릴 때부터 이런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성인이 되어서 책읽기를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독서법은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시기를 놓쳤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안되면 성인이 되었더라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이 훈련을 통해서 독서근육을 키우고 튼튼하게 하여 그 어떤 종류의 책을 만나도 두려움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런 근육을 키우는 데는 조금 따분하고 지겹더라도 고전읽기가 좋다. 동양과 서양의 어느 고전이든 상관없다. 많은 사람들이 고전은 따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책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편견이다. 한마디로 고전은 지난 몇 천 년을 살아남은 책이다. 그 많은 시간동안 인류에는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사라짐을 반복했다. 그런 와중에도 고전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책들이다. 왜 살아남았을까?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그 옛날 책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독서를 할 때는 또한 집중적인 책읽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역사, 철학, 문학, 과학 등 모든 분야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책을 읽다보면 그 방대함과 광활함에 자칫 질려버릴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 분야를 정해서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책을 많이 읽으려는 욕심에 여러 장르의 책을 한꺼번에 읽다보면 결국에는 머리에 남는 것도 없고 이해력도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독서가 금방 재미없어지고 따분해져서 더 이상 책에 손이 가지 않게 된다.
아니면 기간을 정해서 한 작가의 책을 집중해서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액션이든 코메디든 멜로든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정해놓고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때는 영화감독별로 그들이 연출한 영화들을 집중해서 보는 경우도 많은데 독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독서는 생활화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도서관에 가서 정자세로 각을 잡고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시간도 없는데 언제 도서관까지 가서 마음을 굳게 먹고 조선시대 선비가 책을 읽듯이 독서를 하겠는가? 그냥 자투리 시간이 남아 어디든 앉아서 책을 읽으면 그곳이 바로 최고의 도서관이다.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공원벤치에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책읽기에 열심인 사람을 보면 마치 배우처럼 멋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독서의 즐거움에 풍덩 빠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