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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니 Jul 13. 2024

가족사전 #9

 아빠는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 이집 저집 밭일이나 허드렛일을 해주며 식모살이를 지내던 엄마는 그날부터 곧장 아빠와 함께 살았다. 엄마는 짐이라고는 가진 것도 별게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식이나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아내를 맞이하며 아빠에게는 혼인신고를 하러 가는 것이 이제는 번거롭고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아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 할 것 없이 아무 누군가에게나 쉽게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털어놓았는데, 거의 항상 나누는 대화에는 '나는 이 아이들을 키우며(나와 남동생) 사모관대 하나 못 입어보고 더럽게도 고생하고 이 아이들 아빠와 살다가 도망 나왔다'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엄마는 예쁜 드레스 또는 사모관대를 입고서 결혼을 하고 싶었던 여성이라는 것을 그때마다 느꼈다. 당연한 것을 못해보았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커서 언젠가 서류가 필요해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을 떼야 할 일이 있었는데 아빠 아래로 이혼한 전처들의 이름, 그리고 '동거인'으로만 기록된 엄마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아빠엄마가 법적으로 혼인관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빠를 미워하고 있던 마음에 서운하고 차가운 마음까지 더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빠는 엄마와 다툴 때면 아이들만 놓고 맨몸으로 나가라고 했다. 법적으로 혼인관계가 아닌 동거 사이였기에, 그래서 아빠는 엄마와 다투거나 화가 났을 때 엄마를 언제든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아빠는 지나온 여러 아픈 시간 속에서 미움과 불신으로써, 자신이 버림받기 전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상처받기 전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 아닐까도 싶다. 그래도 아빠가 미웠다.


 엄마는 당시 많은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가부장적이며 남편이 아내에 대한 폭력이 당연시되던 시대를 살아왔다. 전 남편에게 역시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억압과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아이들과도 강제로 헤어지며 처참히 혼자 버려졌다. 아빠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이 '가르친다'라는 명목하게 아내들을 꾸짖고 폭행했다. 엄마는 아빠가 함께 살자고 했을 때 이 남자 역시도 나를 때리면 어쩌지, 전 남편처럼 나를 거칠게 대하고 버리면 어쩌지라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집도 절도 없이 다른 집 식모 일을 전전 긍긍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보다, 어쩌면 다시 식구를 꾸려나갈 수 있는 곳이, 의지할 누군가가 있는 거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나름 신혼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엄마를 데리고 다니고, 마을장이 열릴 때에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엄마를 소개했다.


"나 세 번째 각시우다"

(내 세 번째 아내에요)


 하지만 이런 표현이 엄마를 기쁘게 할리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어디를 함께 가는 것을 싫어했다. (훗날에 내가 아빠에게 물어보았을 때, 아빠는 여러 가지 의미로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앞전의 각시 둘도 다 떠나버리니 마을 사람들이 아빠가 혼자된 처지를 불쌍하게 바라봤기 때문에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시 장가를 갈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 각시들과 엄마를 헷갈려 할까봐 세 번째 각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여타 등등.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건 좋은 표현이 아니야. 엄마가 아빠를 누군가에게 두 번째 남편이라고 소개한다면 기분이 좋겠어?" 아빠는 "그럼. 좋지." 그래서 나는 "휴, 그래. 말하는 내 입만 아프지" 하고 말았다.)


 엄마는 6살 때 고아가 되었다. 기쁘게 언니(나의 이모)의 손을 잡고 따라나온 시장에서 안타깝게도 언니를 잃어버렸다. 외할머니(나의 외할머니 곧 엄마의 엄마)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같이 나왔는데, 6살난 어린 동생의 손을 계속 잡으며 시장을 보는 것이 이모는 힘들었던 것 같다.


"복심아, 어디 가지 말앙 여기 고만히 앉앙 이시라이! 언니 재기 갔당 오켜이! 꼭! 여기 고만히 이시라이!"

(복심아, 어디가지 말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 언니 빨리 갔다 올게! 꼭 여기 가만히 있어야 해!"


"응. 언니. 재기 와이!"

(응. 언니. 빨리 와야 해!)


 6살 난 어린아이가 장시간 한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맛있는 빙떡을 파는 장사꾼도 보였고, 엿을 파는 장사꾼도 보였다. 조금 출출했던 엄마는 얼마나 맛있게 만들어졌는지 잠깐만 구경하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으려 했다. 하지만 구경하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 했을 때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장이 끝날 때까지 하루 종일 언니를 찾아 시장 여기저기를 헤맸다.


"언니...! 언니...! (훌쩍) 아저씨 우리 언니 호끔 찾아줍써... (엉엉)... 아줌마 우리 언니 호끔 찾아줍서"

(언니...! 언니...! (훌쩍) 아저씨 우리 언니 좀 찾아주세요... (엉엉)... 아줌마 우리 언니 좀 찾아주세요"


 당시 제주는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그로부터 수년간 제주4.3사건이라는 참혹한 민간 학살이 이어지고 있었다.  죄 없는 수많은 제주도민이 정치적이고 야만적인 살상의 대상이 된 아픈 사건이었다. 어둡고 암울한 시간을 보낸 뒤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것도 잠시, 얼마 안 되어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 625전쟁이 끝나고서도 이념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죄 없는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나는 그것은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라는 겉옷으로 포장한, 속은 탐욕적이며 권력을 위한 시뻘건 속내로부터 발생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사람들은 그 죽음이 자신의 죽음이 될까 봐서 다른 누군가를 도울 엄두를 감히 낼 수 없는 아픈 시대였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언니를 찾아달라는 6살 난 아이의 말에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들어줄 엄두가 쉽게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어린아이의 언니도 누군가가 끌고가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엄마는 하루 그리고 이튿날까지 언니를 시장에서 기다렸다. 배가 너무나 고파진 6살 아이의 선택은 시장을 나와서 가까이 보이는 집, 이집 저집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이었다.


"아주망, 나 여기서 일해주크매 밥 호끔만 줍서"

(아주머니, 나 여기서 일해줄 테니 밥 조금만 주세요)


"아고게 아고게 일 어쩌. 느 집촛앙 가라이"

(아이고아이고 일 없다. 네 집 찾아가거라)


"할망, 나 여기서 일해주크매 제발 밥 호끔만 줍서. 배가 하영 고팡 죽을거 닮우다 제발 밥 호끔만 줍서"

(할머니, 나 여기서 일해줄 테니 제발 밥 조금만 주세요. 배가 많이 고파 죽을 거 같아요. 제발 밥 조금만 주세요"


"일 어쩌, 느그 어멍아방 죽어벤댜?"

(일 없다, 너 엄마아빠 죽어버렸니?)


 수없이 많은 집 문을 두드려 밥을 빌었을 6살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내 가슴이 아려오고 눈물이 난다. 겨우 어느 집에 들어가 엄마는 일을 해주며 비로소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엄마가 밥을 얻어먹었던 그 집은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하나 있던 아들을 잃어 부부만 남게 되었던 집이었다. 부부는 엄마를 양녀로 들였다. 엄마가 그 양부모를 기억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기억이었다. 자신에게 예쁜 꽃신을 사주고 '매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 그리고 어느 날 순사들이 몇 명 집에 찾아왔는데 그들이 양부모의 팔을 끌고 나갔다는 것. 그러면서 부부는 엄마에게


"매화야! 어멍아방 느 오라방 강 초자오크매 어멍아방 따라오지말앙 집에 고만히 이시라이!"

(매화야! 엄마아빠가 네 오빠를 가서 찾아올 테니 엄마아빠 따라오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어멍! 아방! 나도 따라가쿠다 (엉엉) 나도 데령갑서!"

(엄마! 아빠! 나도 따라갈래요 (엉엉) 나도 데려가 주세요!)


"오지 마라 집에 이시라! 오지 마라 매화야! 오지 마라!"


 부부는 끌려가면서 엄마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연신 외쳤다. 엄마도 왠지 겁이 나 따라가다가 발을 멈추었다고 한다. 기다리고 있으면 오빠를 찾아돌아오겠다는 양부모의 약속을 믿고 엄마는 내내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양부모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1947년 3.1절 발포사건 :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1일 기념식 행사 직후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고 조치 없이 달아나자 성난 시민들이 경찰서에 몰려갔고 항의하던 시민을 경찰이 폭도로 오인하여 발포한 사건. 제주 인구 10/1 이상의 사상자를 낸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오후 2시 45분께,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시위대가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이 급히 경찰서 쪽으로 달려간 다음에 터진 총소리, 관덕정 광장 앞에 있던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미군정 경찰이 구경꾼들을 향해 총을 쏜 것입니다. 3.1대회를 앞두고 미군정에서는 제주지역에 100명의 응원경찰을 내벼보냈습니다. 이날 발포를 한 것도 육지에서 급파된 응원경찰이었지요. 민간이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발포사건이 3만 명의 희생자를 낸 4.3사건의 도화선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그때의 발포는 분명히 경찰의 과잉대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사망자 대부분이 등에 총을 맞았습니다..당시 사망자 6명 중 한 명은 아기를 업은 여성이었고 학생,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항의하는 군중이 아니라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미군정에서 제주도민들의 아픔에 대해 경청하고주민의견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미군정이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으려 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오히려 반대로 나갔습니다. 미군정 경찰은 제주도를 아예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제주도민 90%가 좌익 색채를 띠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북한과 연결되었다거나 주민들이 그 정도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모두 잘못된 주장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4.3이 머우꽈?》 p. 13~15 내용 중 / 제주 4.3평화재단 제작 및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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