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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니 Oct 14. 2023

가족사전 #2

아빠는 10살에 고아가 되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할아버지는 군경토벌대인지 무장대인지에 의해 대낮에 끌려나가 행방불명이 되셨다. 당시 아빠나이 고작 6살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빠는 내게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할아버지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할머니가 계신 친구들이 부러워 아빠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궁금하여 물어볼 때면 아빠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어

"나도 기억 못하켜(나도 기억을 못하겠다). 아방이영 어멍이영 얼굴도 기억이 안남쩌(아버지,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이 안난다). 물어보지 말앙 속솜허라(물어보지 말고 잠잠해라)."

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침묵했다. 그때를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아빠는 부모를 생각할 때에 속상한 마음 반,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롭게 이야기 나눌 수 없고 쉬쉬했던 제주 4.3 사건. 그 인식과 시선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스물네 살 무렵 아빠와 재회를 하고나서부터는 친척집 제사에 아빠를 따라 함께 다녔는데 그제야 그곳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돌아가신 이유를 들을  있었다.


"무장대가 산에 곱앙 있당 밤되면은 마을로 내려왕 밥달랜 집마다 솔짝이 문을 두들겼쩌(무장대가 산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밥을 달라고 집마다 조용히 문을 두들겼다). 누게꽈 하멍 문 열어주당보면 무장대 들랜 하고 자기들 먹을 밥을 달랜 하는거라(누구냐 하고 문을 열어주면 무장대에 가입을 하고 자신들이 먹을 밥을 달라고 했다). 겅하다그냉 토벌대한테 들키면 죽는댄, 못주캔 하면 죽영 가부는거라(그러다가 토벌대한테 들키면 죽는다고 못 주겠다고 하면 죽이고 가버렸다). 군경토벌대도 마찬가지라(군경토벌대도 마찬가지였다). 너네 빨갱이지 하고 물어봥 호끔만 이상해도 죽여부는거라(너희 빨갱이지 하고 물어보고 조금만 이상해 보여도 죽여버렸다). 누게가 나신디 총갔다대믄 안놀랄 수 이샤?(누군가 나한테 총을 갔다대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겅해도 막 죽여부는 거라(그런데도 막 죽여버렸다). 옆에 북촌리는 마을사람 싹다 빨갱이로 몰아그냉 같은 날 총살행 죽여불고 불질렁 죽여불고(옆에 북촌리는 마을사람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 같은 날에 총살해서 죽이고 불질러서 죽여버렸다). 너네 할아방도 겅행 심엉강 산에서 죽여분거라(너희 할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잡아가서 산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삼촌은 그도 자신의 아버지(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작은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군경토벌대를 피해 산에 숨어 있던 무장대가 배가 고파 한밤중에 산에서 몰래 내려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한다. 무장대는 그들 단체에 대한 가입을 강요했고, 밥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군경토벌대가 무서워 그들의 제안에 거절하면, 그들도 군경토벌대처럼 마을사람들을 죽여버렸다. 또 이번에는 그런 무장대를 잡고자(또는 무장대로 몰고자) 군경토벌대가 찾아와 마을사람들을 수색했는데, 조금만 쉬쉬거리거나 피하면 빨갱이로 몰고 가차 없이 죽였다. 누군가에 의해 정당하지 않은 폭력을 당해야만 하던 때, 죄인이어야만 하던 때, 죽어야만 했던 때, 머리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비지성의 시대였다. 수년에 걸친 학살로 제주인의 10분의 1이 처참히 목숨을 잃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 수많은 피해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참 멋진 사내였다고 한다. 조천읍내에서 마을씨름대회가 열리면 할아버지는 항상 이겨 쌀 한 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왔다. 체격도 좋고 성실했던 할아버지는 어여쁜 아내와 아들딸을 살뜰히 돌보는 사내였다. 열심히 모아 집도 사고 밭도 샀던 든든한 가장이던 할아버지는 한순간에 누군가에 의해 끌려나가 집으로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남편이자, 두 자녀의 아빠였던 든든한 가장을 잃은 깊은 상실감, 마을 여기저기에서 계속되는 가차 없는 폭력과 학살, 어떻게 재정신일 수 있겠는가. 결국 할머니 마저 화병이 나셔서 아빠가 10살이던 때에 돌아가셨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기억할 수 없었지만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함께 손잡고 걸었던 등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아빠의 나이 어느덧 일흔여섯, 수십 년 전에 잡았던 어머니의 따뜻한 그 손을 아빠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뿐이었다. '부모'라는 존재의 이름을 기억할 있는 가지의 기억. 하지만 그 하나 있던 소중한 기억마저 이제는 흐릿해진다고 했다. 아빠에게는 부모님의 따뜻한 애정의 기억, 사랑에 대한 추억, 가족이 주는 평온함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빠는 고작 6살, 10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여의고 6살 난 여동생과 함께 친척집을 돌며 살았다. 학교도 다닐 수 없었거니와 낮에는 밭일을 도와주며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집에 돌아오면 여동생(나의 고모)은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 있었다. 그런 동생을 등에 업고 달래 가며 잠이 들 때까지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고 한다. 청년이 되기까지 아빠와 고모는 이집저집 친척집을 돌며, 일을 해주며 밥을 얻어먹고 살아야 했다. 이들의 유년시절은 상실과 억압과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나와 내 남동생이 겪어야만 했던 유년시절의 불온했던 고통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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