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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니 Feb 28. 2024

[조금 늦은 프롤로그]

'가족사전'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2013년 스물네 살 11월의 겨울이었다. 지금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니 10년이 조금 지난 이야기이다.  그때 그 겨울에 나는 오랫동안 인연을 끊고 지냈던 아빠의 집을 찾아 나섰다. 스스로의 힘으로든 신앙의 힘으로든 내 마음들을 어르고 달래 오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달래 지지 않은 마음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내게 무엇인지 생각할 때면, 내 안에 있는 어두운 자아와 힘겹게 씨름하며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잔상들을 떨쳐내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러한 생각들은 지난 과거로부터 지금의 나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강하게 끌고 내려가 더욱 아프고 고통스럽게 짓누르며 침몰시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떨쳐버리려야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들이었다. 그 아픈 기억들은 전부 깨진 유리조각 파편들이 내 살갗 여기저기에 박힌 것처럼 모두 쓰라린 고통을 주는 그런 기억들뿐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어디서부터 올라오는지 모를 파괴적인 생각으로 인해 자해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자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도 줄곧 계속되었다. 자해를 할 때면 분노가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 그뿐이었다. 좀처럼 내 안에 있는 슬프고도 파괴적인 분노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엄마는 내가 소위 타인에게 문제로 보이는 행동들(자해, 일탈과도 같은 그런 것들)을 할 때면 "네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느니 "미**"과 같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엄마가 내게 그런 욕을 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 아프기는 했지만 내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할 수 있는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하는, 나를 아프게 하는 행위가 엄마를, 남동생을 얼마나 괴롭고 힘들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멈출 수가 없었다. 늘 후회하고 나면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내 방 한구석에서 자해를 하고 난 뒤였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대학에 입학해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아동복지를 전공했는데 강의시간에 나와 비슷한 사례의 아동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로 화장실로 달려가서 꺽꺽 울기 일쑤였다. 눈물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대로 수업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서 울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 내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느 날 지도교수님께서 나를 조용히 교수실로 부르셨다.


"지수야. 너의 사연을 내가 다 알지 못하지만, 지수가 나중에 좋은 치유자가 되려면 지수 안에 있는 지수가 먼저 치유가 필요하단다."


교수님의 걱정 서린 눈빛, 깊은 듯 넓은 따뜻한 목소리. 누군가의 앞에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히 울어본 일이 많지 않았는데 그날 교수님 앞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교수님의 배려와 도움으로 일 년 정도 매주 심리치료를 받았다. 어려운 치료는 아니었다. 아니 조금 어려울 때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그림을 그리고 왜 그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 됐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내 이야기를 길게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숨기고 싶거나 억눌렀던 이야기를 꺼낸 다는 것은 더더욱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심리치료를 해주신 선생님의 자상함, 그리고 그녀의 기다림 덕분에 나는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며 내 안의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 속 대부분은 나의 외로움과 분노, 나의 상처, 나의 죄책감 등이 담겨 있었다.

미술심리치료를 받으며 그렸던 그림들

심리치료를 받으며 알게 된 것은, 사실 나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보다는 아버지의 폭력적인 상황에서 엄마와 남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훨씬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남동생에 대한 죄책감은 나를 스스로 파괴시키고 싶을 만큼 내게 심한 고통을 주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죄책감을 주는 기억들은 고작 내 나이 8살, 9살의 기억들이었다. 그러한 죄책감의 기억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억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날 수없는 고통 속에서 자해를 했던가.


그렇게 심리치료를 받으며 일 년을 보내고서 새봄이 찾아오던 날이었다. 회가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지만 중학교 이후로 자해가 심해지고 타인과의 대화도 싫어지면서 교회마저 떠나버렸었다. 그렇게 떠나버렸던 교회가 다시 생각나 찾아갔다. 그날은 예배가 없는 날이었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빈 예배당에 앉아 가만히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이내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먹먹함이 올라왔다.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며 앞에 보였던 커다란 십자가가 움직이며 내게 다가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째서 저를 만드신 건가요?"


"왜 저의 부모를 만드셨나요?"


"제가 자해를 할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나요?"


하나님은 내가 묻는 질문에 어떠한 답도 해주시는 것 같지 않았다. 멀쩡했던 십자가에서 갑자기 기적처럼 번쩍이는 광선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앉아있던 의자가 흔들리거나 주변에서 갑자기 천사가 빛나는 광채로 나타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전해주지도 않았다.


아무 응답도 없다고 느껴지면 '아, 없구나. 신은 정말 없어' 하고 돌아서고 나오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때 나에게는 행복해지고 싶은, 내 외롭고 답답한 마음으로부터 자유해지고 싶은, 그런 (간절히 원하는) 소원과 갈망들이 십자가 앞에서 떠날 수 없도록 내 발을 붙잡았다. 응답 없는 저 지극히 높아 보이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내 소원을 말했다.


"당신이 정말 있다면 제게 자유를 주세요. 이 괴롭고 힘든 기억으로부터의 자유, 나를 아직도 파괴시키려고 하는 상처로부터 자유를 주세요."


얼마 뒤 학교에서 목발을 짚은 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작은 체구이지만 손은 커다랗고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가 와서 한쪽발을 사용하지 못했다. 불편한 쪽의 발에는 나머지 움직일 수 있는 발과 높이를 맞추고자 매우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잘 걷고자 신발을 만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한 기독교동아리의 사님이자 목사님이었다. 우리 과 동기들 중에 친하게 지내던 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 것 같았다.


"지수야, 지수는 정말 소중한 존재란다."


그는 내게 성경을 가르쳐주었고, 신앙의 힘으로써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빠를 비롯해 남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던 나에게 그는 긍정적인 부성애도 느끼게 해 주었다. 나에게는 지금도 참 따뜻한 분이시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그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수야, 지수는 정말로 지수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해를 멈추며 자존감도 어느 정도 건강해졌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죽어줄 수는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내 주머니가 텅텅 비어도 행복할 만큼 종종 기부도 했다. 엄마와 동생에게도 주변의 친구들로부터도 어느새 나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가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인지 나는 오랜 시간 고민이 되었다.


그는 자주 농담을 하는 분이셨지만 농담일지라도 빈말은 없으신 분이셨다. 가벼운 말 같아 보일지라도 깊은 의미를 돌려 담아 말씀해 주시는 그런 분이셨다. 그의 질문에 나는 정말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사실 지금도 한 번씩 내 마음을 돌아보며 고민될 때가 있다.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일까. 나는 정말 다른 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일까."


비록 확실한 대답을 지금도 할 수는 없으나, 아빠와의 재회를 하고서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와 함께하며 의 병을 돌보면서라야, 엄마가 치매를 앓기 시작한 이래로 지난 8년 동안 함께하며 녀를 돌보고서야, 동생의 2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고통스러운 어둠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보고 기도해주면서, 나는 비로소 그가 왜 내게 그 질문을 하셨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내가 쓰려는 글은 종교적인 이야기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간간이 그러한 마음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지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다시 말해 '가족사전'을 쓰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쓰는 글이다. 그리고 나의 가족을, 아빠라는 존재를, 엄마라는 존재를, 동생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며 사랑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억지스러운 사랑이 아니라, 훈련되어진 사랑이 아니라, 이해를 통한 사랑의 결과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나는 그동안 나 자신에게만, (좁은 의미로는) 내 자신의 상처에만 몰두해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상처도 중요하지만 그 상처를 온전히 낫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건 이전에, 상처 이전에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이해하고 존중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이해의 끝에 비로소 사랑이라는 것을 있을 같아서.. 그리고 족쇄로 단단히 묶여 곪아있는 마음에도 진정한 자유를 있을  같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종종 나의 훈련된 친절함 때문에 나를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여긴다.

"지수씨, 지수씨는 사랑이 참 많은 사람 같아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사랑을 잘 몰라요. 저는 얼추 사랑 비슷한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듯해요. 어떤 것이 진짜 사랑인지, 사랑하는 삶인지를 정말이지 알고 싶어요."


가족사전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이러한 생각에 작은 변화가 찾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를 진정으로 이해하며 스스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어있기를, 아빠를, 엄마를, 내 하나뿐인 남동생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있기를.


부디 내 부족한 글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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