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전 직업은 음악점역사이다. 점역사라는 직업이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듯하다. 당시에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점역하고 있어요”
라고 대답하면 다시 되물었기 때문이다.
“점역이요?”
엘리베이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점역이다. 엘리베이터 숫자옆에 이상하게 오돌토돌한 점들이 튀어나와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역표기이다. 개, 폐, 그리고 층수..
내가 이 직업을 알게 된 건 대학졸업을 앞에 두고 이다. 나는 경영을 전공하다 2학년 때 자퇴하고 가족의 빚을 함께 갚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 어느 정도 빚을 청산하였을 때 나를 버티게 해 준 음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곡과에 대해 알아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꾸준하게 피아노를 쳤었기에 입시곡만 연습해면 됐고 이론은 집 근처 선생님을 찾아 배우기 시작했다. 회사에 근무 중이라 매일 평일 저녁 퇴근 후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공부를 했다.
1년 반 이후 나는 TO가 있는 몇 개 학교에 지원서를 냈고 2곳에서 합격통보를 받고 퇴사 후, 늦깎이 28살 대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편입으로 입학을 하였기에 나의 수업은 늘 21학점~24학점 꽉 차있었다. 학비는 학자금대출로 충당했고 방학 때는 또 알바를 했다.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4명이서 학식 두 개를 시키고 밥을 싸와 학식의 국과 반찬을 함께 먹으며, 김재벌, 이대가, 박천재, 오소미라고 서로를 부르며 공부에 전념했다. 2년은 빨리 흘렀다. 졸업이 다가오는데 음악공부를 하며 내가 이것으로 밥을 먹고 살 수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난 음악에 재능이 없구나.. 노력해도 안된다는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졸업 후 무슨 일을 할까 고민을 했다. 그러면서 음악과 관련된 직종을 찾았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바로 “음악점역사”였다. 음악 관련학과를 졸업한 학생들만 지원이 가능하였다. 난 주저 없이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았다. 내가 면접 때 한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반짝반짝한 일이라서 지원했습니다. 악보를 볼 수 없는 사람에게 통로역할을 할 수 있는.. 제가 가진 것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라서 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면접에 합격했고 졸업 전에 취업에 성공했다. 음악점역사가 되는 길은 쉽지는 않았다. 세를 떼고 나면 100만 원이 되지 않는 월급. 월급을 올리려면 자격증이 필요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선 먼저 3급 국어점자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다. 근무 후, 8개월간 공부하며 국어점역사 자격증을 따고 난 후에야 음악점역사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음악점역사 자격증 취득 후에는 영어점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래서 난 비로소 1급점 역사이자 음악점역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00여 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국어, 음악, 영어, 수과컴, 일어 자격증이 있고 민간자격증이다. 처음에 국어점역사 자격증을 먼저 취득해야 다른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으며 국어점자 자격증은 자격의 요건은 따로 있지는 않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면 도전해 볼 수 있는 자격증이다. 물론 공부하는 과정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복지관 등에 문의를 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점역사들은 수능문제도 출제하고 교재도 만들고 일반 도서, 악보, 그리고 촉각교재도 제작한다. 그래서 수학과를 나온 점역사, 중국어를 전공한 점역사, 미술과 음악을 전공한 점역 외에도 많은 분야의 전공자들이 있다. 점역사들의 전공은 각 분야의 해당하는 책들을 점역하는데 더욱 전문성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음악점역을 할 때를 예를 들어보겠다. 점역방법의 기본은 있지만 하나의 악보를 점역할 때에 여러 가지 분석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점역할 수 있다.
점역사들은 어떻게 점역하는 것이 시각장애인이 악보를 이해하기가 좋은가에 대해 늘 고민하고 악보의 점역이 잘 되었는지를 검증하는 교정사와 의논하여 악보를 완성해 간다. 둘이서 해결이 되지 않을 때에는 다른 점역사들과도 회의를 하기도 한다. 단순히 복사한 것처럼 옮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점역사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점역사들은 대부분 복지관이나 도서관등에서 근무를 한다. 복지업무나 사서업무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점역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에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많이 아쉬웠다. 나는 한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근무했고 그곳에서 근무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했었다.
우리 회사의 음악점 역사들은 대부분 음악재활센터에서 일을 했다. 대부분 여자가 많았고 작곡과 피아노과 성악과 친구들이 많았다. 그 외 가끔 관현악 친구들도 있었다. 음악재활팀은 타 사무직과는 다르게 늘 시끄럽고 감정적이며 스펙터클 했다. 우리의 음악적 감성이 사무실 분위기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 부서 사람들도 있었다.
“재들은 왜 맨날 시끄러워?”
우리의 이런 특징이 없었다면 난 음악을 전공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가끔 생각한다. 음악점역 사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일이었다. 시각장애인아이들에게 음악도 가르치고 1년에 한 번 그 친구들이 서는 무대를 꾸렸다. 무대에서 아이들이 연주를 마치고 나올 때 나는 매번 감동하였다. 그 친구들과 부모들이 가진 아픔을 이해할 순 없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서 빛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내가 기특했다.
이직을 하고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이 반짝반짝 빛나는 곳을 내가 떠난 것이다. 그러나 난 아직도 꾸준히 보수교육을 받으며 자격을 이어나가고 있다. 악보의 음계하나하나를 옮겨가던 일을 내 손이 기억하고 있다. 참 신기하다. 일을 그만둔 지 벌써 5년이나 되었는데도 말이다.
음악점역일을 하며 하나의 비전을 두게 되었다. 언제고 내가 대학생 때 불리던 별명처럼 김재벌이 된다면 장애를 가진 친구나 불우한 친구들에게 언제든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막연하고 터무니없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내가 절망스럽고 무너졌을 때 나를 잡아주고 위로했던 그 시간을 기억하며 매일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더라도 더 나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갖고 그 시간을 감내할 수 있도록 음악으로 위로하고 싶다. 취업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내가 목표한 것들이 달성될 때마다 작지만 기부를 시작했다. 난 예전에 음악점 역사였고 아직도 음악점역사이며 이 일을 알게 되어 참 감사하다.
러로이ㅓ 어ㅣ잉락 ㅣㅓ넝이라ㅣᅟ걸 ㄴㅇㄹㄴ라어
이 말은 키보드로 나는 음악점역사이다라고 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