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리 Nov 02. 2024

공원 옆길

공간에 대한 글 쓰기

군자는 대로행 이라는데 난 뒷길이나 오솔길을 좋아하니 태생이 군자 재목은 아니었던 듯하다.

뒷길은 대부분이 지름길로 쓰는 옛길이라 볼품없기 일쑤지만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뜻밖의 길을 만날 때도 있는데 바로 H마트 뒷길이 그랬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그 길을 무거운 장바구니 든 채 전화받느라, 마트 직원들이 삼삼오오 쉬는 빨간 벽돌 담장 같은 기다란 의자에 앉았다가 보게됐는데 절반쯤 진 꽃과 돋아난 이파리가 어우러져 나풀거리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아름다운 벚꽃터널이 있었다. 아이고 이걸 놓쳤구나! 꼬박 일 년을 기다려 이듬해 만개한 벚꽃길을 걸으며 눈처럼 쏟아지는 꽃구경을 했다.

돌아 나오는 길, 철물점 옆엔 고소하고 달콤한 커피향에  휩싸일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대로 문 열고 들어가고 싶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오마카세 커피집이 있었다.

통유리창으로 들여다 보니 하나뿐인 6인용 나무 테이블에서 회색빛 머리칼에 베이지색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남자 바리스타가 나란히 앉아있는 두 손님을 마주하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다.

이처럼 메마른 일상에 행운처럼 마주치는 뒷길이나, 생각에 빠져 하염없이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은 오래 만나 편안한 친구처럼 반갑고 정겹다.


505동과 508동 사이 조붓한 계단을 내려가면 널찍한 공원이 펼쳐지는데 잔디밭 한쪽에 울타리를 치고 파크골프장으로 쓰다가 개 운동장이 되더니 요즘은 또 공사 중이다. 순수 민간인들은 배추 한 포기 시금치 한 단에 손이 달달 떨리는 판인데 관공서엔 돈이 넘쳐나는지 멀쩡한 공원을 몇 달 주기로 갈아엎는다.

그래도 큰길 쪽으론 트랙터가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초여름엔 노란 유채꽃에 듬성듬성 청보라색 수레국이 섞여 피고, 가을은 아직 멀리 있었지만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니 하얀 구름과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답다.

공원 옆길은 공사가 없을 때는 차 없는 길로 아파트를 등지고 공원을 마주 보도록 여러 개의 벤치가 주욱 늘어서 있다. 거기엔 트로트를 크게 틀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을 살피는 할아버지, 개와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젊은 여자가 있고, 쪄 죽을 것 같은 날씨에도 풀 메이크업에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긴소매 옷에 하얀 장갑까지 낀 채 운동 나왔다 잠시 숨을 고르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주머니와, 공원 끝 신호등 옆 영산홍 나무 뒤에 숨겨진 길고양이 집 앞에 사료와 물을 놓아주고 먹기를 기다려 벤치로 데리고 나와 부비부비 한참을 놀아주는 천사표 모녀가 있었으며, 난 그들을 지나쳐 신호등 길을 건너 종종 과일가게엘 간다.

계단을 내려서면 왼쪽으로 벤치 세 개가 쪼르륵 붙어있다. 과일 사서 돌아오는 길, 무거운 복숭아 상자에 힘이 달려 평평한 가운데 벤치에 내려놓고 앉아서 팔을 주무르며 건너다보는 공원 귀퉁이 작은 연못엔, 가끔 낮은 분수가 일기도하고 돌멩이에 자라가 올라앉아 햇볕에 몸을 말리거나 큼직한 잉어 붕어가 떼 지어 몰려다닌다. 사람들은 물고기 먹이 주지 말라는 안내판을 외면한 채 후루룩 옥수수 강냉이 따위를 던져준다. 하지만 언젠가 공사 한 번 끝나고 나니 잉어부터 송사리까지 씨가 말라버렸다. 설마 누가 몽땅 건져다 매운탕으로 끓여 먹은 건 아니겠지.

흙탕물이 가라앉고 연못 바닥이 보이도록 물이 맑아진 날 그들이 돌아와 있길 바랐었지만, 오며 가며 몇 번을 들여다봐도 물고기와 자라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계단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세 개의 벤치는 노상 할머니들이 차지하다시피 했다. 의자겸용 밀차에 장을 봐 오는 중이거나 혹은 지팡이에 의지해 산책 하시다가, 때로는 절뚝이며 공원을 돌다가 그 자리에 모여 앉아 쉬면서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늘 시끌벅적했고 들리는 말은 주로 아들 자랑 며느리 욕이었다.

우리 메누리넌 내가 그렇게 김치를 해 보내도 이날 입때 꺼정 고맙다거나 잘 먹었다거나 말 한마디가 읎고 십 원 한 장 주는 법이 읍써. 어째 그까 아덜두 그래?

우리 아덜이야 순허구 착허구 세상에 그런 효자가 읎지. 사나운 예펜네 땜에 입 닫구 사는거지.

시끄러워지니께. 보믄 불쌍 허구 밉기두 허구 글치.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서 들어보면 며느리 말이 옳다고 했으니 그 집 사정을 뉘라서 알 수 있으랴.

작가의 이전글 여정(旅程)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