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Editor.성산
2월 8일의 이야기
도대체 혼자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뒹굴뒹굴하던 시골생활이 끝나갑니다. 돌아보면 저는 살면서 혼자 지내본 적이 없네요.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도 거실에 가족들 소리가 들리니까 이렇게 고요한 공간에서 하루 이상 지내본 일이 없는 것 같아요. 혼자 시골에서 살아본 소감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장소에 있었던 기분은 참 묘했습니다. 그런 거 있지 않나요. 나를 혼자 뒀으면 좋겠지만, 막상 혼자 있는 건 외로운?
올해는 날씨가 정말 오락가락하는 것 같죠. 어제 눈이 그렇게 왔는데 벌써 다 녹았어요. 이곳은 위쪽 지방이라 아침 일찍에 나오면 좀 추워요. 그래서 눈은 거의 녹았지만 서리 낀 걸 볼 수 있어요. 햇빛받아서 반짝반짝하는 게 얼마나 예쁜지. 그러고 보니 재작년, 갑자기 새벽에 기온이 훅 떨어져서 대왕 서리가 낀 풍경을 본 적이 있는데요. 가끔 이렇게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했을 때. 이 장소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전에 이곳이 아빠의 고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주말이나 명절에 꽤 오래 이곳에서 지냈었어요. 그때마다 아빠는 저를 데리고 주변을 산책하면서 어렸을 때의 생활, 뭐 하면서 놀았는지 자주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형제가 많아 이부자리를 다 같이 정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 강제 기상을 해야 했던 이야기. 부뚜막에 살던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 고양이에게 밥을 주다가 물려서 싫어하게 됐다는 이야기. 토끼풀로 이것저것 만들면서 놀아 토끼풀 팔찌 장인이 된 이야기. (조금 잔인하지만) 참새의 어느 부위가 살이 가장 많은지 등등의 이야기들.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9)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오죠.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어.'
주인공 혜원의 엄마가 그녀에게 남긴 편지의 일부입니다. 결혼 후 시골로 내려온 혜원의 엄마는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혜원을 시골에서 키웁니다. 어른이 되어 언젠가 힘든 시기가 와도,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하며'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시험 준비하느라, 아르바이트하느라 먹고 살기 바빴던 혜원에게 시골, 고향이란 잊고 있었던 삶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만드는 공간입니다. 직접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고, 집을 정돈하고. 삶의 본질적인 과정을 돌아보고 생명의 조용한 움직임을 옆에서 지켜보며 말이에요.
저는 도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곳, 시골의 삶이 익숙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 놀러 가서 뒹굴뒹굴하고, 온갖 피곤하게 했던 것들을 두고 쉬러 오는 고향이라고 말해요. 물론 불편한 점도 많죠. 벌레가 많고, 밤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인터넷도 안 터지고. 가끔 귀찮으면 배달시켜서 먹고, 편안하게 누워 유튜브를 볼 수 있는 도시가 편하긴 훨씬 편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무언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가끔 말소리가 소란스럽다고 느껴질 때. 바람을 쐬러 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건 정말 큰 것 같아요.
사람의 뇌는 단순해서, 어떠한 공간에 역할을 만들어주면 그 행동을 해야겠다고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된대요. 그래서 일하는 공간과 휴식을 취하는 공간을 따로 만들라고 하죠. 저에게는 시골이 그런 장소네요. 머리 감고 말리기 귀찮으면 마루에 앉아 산바람에 말리고. 가끔 보이는 고양이도 따라가보고. 고추 모종 심기 무료체험도 하고요. -여전히 집 안에 벌레가 많은 건 너무 싫지만 이제 종이로 잘 담아 밖에 놓아줄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아버지 이야기도 좀 해볼까 합니다. 원래 할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던 땅에 집을 짓게 되면서 앞에 큰 농지 마당이 생겼어요. 저희 아버지는 거기서 들깨 농사를 하시는데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완전히 시골에서 정착하기 전 시범 단계로 장사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요, 저희 아버지 들기름을 알리고자 꺼냈습니다.
가을에 오면 앞이 들깨로 꽉 차요. 거의 인터스텔라의 옥수수 농장 같아요. 이 시기의 아빠는 정말 바쁘세요. 본업 하고, 끝나면 들깨 보러 시골 가고. 아빠를 보면 뭔가 농사 게임 속 캐릭터를 보는 것 같아요. 농사지어서 작물 팔고, 판 돈으로 기계 업그레이드하고 그러잖아요. 전에 깨를 털고 옆 창고에 보관해뒀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쥐들이 폭식을 하고 간 흔적이 있더래요. 그래서 새 창고는 쥐가 못 들어오게 꼼꼼하게 바닥 처리하고, 방충망 문 설치하고. 또 기름 짜는 기계도 어디서 구해오셔서. 이젠 거의 들기름 공장처럼 보여요. 완전 가내수공업이죠.
기름 짜는 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고소한 냄새가 엄청납니다. 전에 냄새를 맡고 들어온 새를 쫓아내느라 몇 십 분을 기싸움했다는 이야기. 가끔 제가 시골에 놀러 오는 날엔 옆에서 포장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시골에 있으면 자꾸 할 일이 생긴다는 아빠. 옆에서 보고 있으면 힘들어 보여 걱정이 되다가도, 그게 아빠의 소소한 재미인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걸 스스로 일구어나가는 모습이 멋있기도 해요.
아빠의 들기름 농장 이름은 '착한 농부 맹기씨'(착한농부 맹기씨 (naver.com))입니다. 찐 국산 들기름 향 맡아보고 싶은 분들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