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내가 초등학생일 때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 학교 앞 문방구는 초등학생들의 커뮤니티 장소였다. 군것질을 사서 친구들과 나눠먹거나, 오락기 앞에서 친구를 응원하던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당시에는 딱지나 스티커, 군것질을 사는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뒤늦게 나이가 들고 그것들을 사보았으나 대부분 추억을 되새기는 정도일 뿐, 옛날의 부러움을 보상해줄 정도의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초등학생 때의 설렘을 아직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었다. 벽 한켠에 걸린 카드팩. 그것을 사서 개봉하는 순간 내 심장은 기대감에 부풀어 두근거렸다. 물론 별게 안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어릴 적에는 단순히 좋아하는 캐릭터 혹은 좋아보이는 캐릭터를 뽑고자 설레었다면 지금은 좀 더 속물적인 이유로 설렌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예전엔 희귀해 보이는게 나오면 문방구 앞이 떠들썩해지면서 친구들끼리 그 카드의 가치를 예상해보곤 했다. 헛소문과 이상한 추측들에 힘입어 조금만 반짝이는 카드도 100만원이 넘어가는 카드로 감정되었다. 돌이켜보면 그저 적당히 예쁘기만 한 카드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카드를 뽑으면 그 날 문방구 앞 주인공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그때 우리에게 캐릭터 카드는 팔고자 하는 상품도, 지금처럼 악착같이 모으는 수집품도 아니었기에 그저 기쁜 마음으로 카드팩을 열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에 잠깐만 검색해봐도 시세가 나오고 희귀도가 정해져 있기에 옛날과는 다른 마음으로 카드팩을 열게 된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했으나 요즘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옛날 같은 엉터리 감정사는 없는 모양이다. 아이들도 자신이 뽑은 카드에 대해서 꽤나 정확한 가치를 알고 있었다. 물론 인터넷에게 이 책임을 돌릴 수도 있지만 옛날에 모으던 캐릭터 카드와 지금의 카드들을 비교해봤을 때 희귀도를 더 명확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러스트레이터 마에야 스스무의 대회 입상작
나는 무언가를 모을 때 제대로 모아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캐릭터 카드를 모으면 내 통장에 돈이 안 남을 것 같아 마음을 접고 있었다. 최근 SNS를 둘러보던 중 좋아하던 일러스트레이터가 뜬금없이 포켓몬 카드 사진이 있는 게시물을 보았다. 살펴보니 그가 포켓몬 카드 시리즈에서 개최한 일러스트 대회에서 입상하였다는 글이었다. 중요한 것은 입상한 일러스트들은 실제 카드로 발매한다는 소식이었다. 이 게시글을 접한 이후 카드의 일러스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카드 게임마다 세계관도 있고, 계속 소비자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항상 새로운 컨셉의 카드를 만들어왔다. 또한 캐릭터 카드 공식 사이트나 데이터 베이스에서 어떤 카드의 정보를 찾다보면 그 카드가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의 손을 거친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카드 일러스트들은 아직 평가절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카드 게임에서 일러스트만 보고 카드를 사용하는 것이 일종의 컨셉으로 인식되고, 일러스트가 예쁘더라도 희귀도가 낮으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지곤 한다. 그리고 주목받는 일러스트들도 주요 카드들 뿐이다. 포켓몬 카드 속 전설 포켓몬들은 항상 주목을 받아도 일반 카드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찾기가 어렵다.
다행인 점은 그래도 카드 회사들에서 계속 일러스트에 신경을 써주고 있고, 실제로 희귀도와 카드 능력치와 무관하게 눈길이 가는 카드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종종 예쁜 카드 일러스트가 입소문이 나서 화제가 된 것을 보고 있으면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전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도 희귀한 카드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다만 그렇지 않은 카드들에도 신경 쓴 포인트들을 찾게 된 것이다. 카드를 한장 한장 천천히 뜯어보게 된 후부터 옛날처럼 카드팩을 뜯을 때 느껴지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돈을 날리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떤 카드를 만날 수 있을 지, 어떤 일러스트를 볼 수 있을 지 기대하게 되는 작은 설렘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