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에 요즘 핫한 뚝도청춘시장이 있다. 여기서 설렁탕 한 그릇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식당 벽에 걸린 새마을금고 달력은 어느새 12월 한 장만 남아있다.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달력은 마치 지나간 한 해를 떠올리게 한다. 벌써 2024년이 지나간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점점 더 빠르게 흐르는 듯하다.
설렁탕 국물을 목으로 넘기면서 흘러가는 달력을 바라보니 남편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 당시의 남편과의 첫 만남은 잊을 수 없다. 당시 나는 영업일을 하느라 바빴고,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사기꾼 같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20대 후반의 나는 술을 잘 마시고, 목소리도 크며, 거친 말투를 쓰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술 한 모금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나를 장사꾼처럼 봤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착하고 가진 것 없이 겸손한 남자가 좋았다. 밤낮으로 바쁘게 일하는 나에게 집안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결혼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과 약속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날을 챙기지 말자고. 나는 기념일에 서로 선물을 주고받거나 외식하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생활 24년 동안 우리 부부가 생일이라고 둘만의 식사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친정엄마는 우리 부부를 보며 늘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참 재미없게 산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내 생일날 대부분 일로 바빴다. 직원들과 저녁을 먹거나 영업 접대 자리에서 생일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생일은 아이를 통해 뒤늦게 알곤 했다. “엄마, 지난주 아빠 생신이라 짜장면 먹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아이를 통해서야 남편 생일을 알곤 했다.
하지만 아이의 생일만큼은 챙기려고 노력했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아이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좋아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점점 각자의 방식으로 생일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따로국밥 같은 가족,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나는 남편이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 것에 서운함을 느낀 적은 없다. 나는 그런 특별한 날 이벤트를 하고 해줌에 어색해하고 둔하다. 하지만 영업 고객들의 생일은 어쩜 그리 잘 챙기는지. 고객 와이프 선물까지 챙겨주곤 한다. 남편은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시 남편은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엄마 말이 맞다! 이렇게 재미없이 왜 살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서로 필요한 존재로 책임감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다.
이제 시간적, 물질적인 여유가 좀 생기고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편과 나, 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둘만 있는 게 너무나 어색했다. 각자 있는 자리에서 서로 터치하지 않고 살자고 했다.
나는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다. 나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운동과 독서, 영어 공부 등을 하며 배움에 빠져 지내고 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일상의 루틴으로 완전히 바꿨다, 이런 와중에 남편은 휴직을 선택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회사를 그만두려 하고 있다.
처음에는 싫은 소리를 했지만, 이제는 그를 이해하려 한다. 산을 오르거나 영화를 보며 쉬고 있는 그를 지켜보며, 그동안 내가 외면했던 그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리게 되었다.
결혼생활 동안 영업인으로서 바쁘게 살며 새벽까지 술 마시고 일에 치였던 나를, 남편은 외로움 속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그를 떠올리니 이제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관계도, 가족 문화도 새롭게 만들어야겠다. 남편과 기념일을 챙기고, 함께 산에도 가고, 오랜만에 둘만의 식사를 해봐야겠다. 누군가 변화해야 한다면, 그 시작은 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족은 삶에서 특별한 선물이다. 남편을 지붕처럼 있는 당연한 존재로만 여겼지만, 비와 눈을 막아주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설렁탕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식당문을 나서는데 겨울 오후의 따사함이 다가온다. 오늘 저녁은 화사한 불빛이 춤추는 식당에서 남편과 저녁을 나누고 싶다.
나의 작은 움직임이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길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