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부터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새벽부터 짐 챙기는 소리에 다른 분들의 잠을 방해하면 안 되니 전날 밤부터 배낭을 준비했다. 루카랑 최대한 조용히 라운지로 가서 마지막 짐인 침낭을 돌돌 말아 쑤셔 넣었다. 반려견 운동장이 알베르게에서 가깝고 또 언제 만날지 몰라 루카에게 5분 정도 자유시간을 줬다. 뛰뛰는 하지 않았지만 모닝똥을 성공했으니 됐다.
팜플로나를 빠져나오는 길은 나바라대학교 캠퍼스를 지난다. 표지판에 똥줍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와서 인상 깊었다. 스페인은 공중화장실은 찾기 어려워도 휴지통은 어딜 가나 널려있다. 배변봉투만 챙겨 다닌다면 조금만 걸어도 휴지통에 버릴 수 있어서 편했다.
아침에 반려견 운동장에 들리지 않았다면 루카를 여기에 풀어뒀을 텐데 이미 자유시간을 가졌던 터라 지나가면서 사진만 찍었다. 어질리티 장비는 대충 봐도 대형견 맞춤 사이즈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반려견 운동장을 실제로 쓰는 강아지를 본 적이 없다.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난 카페에 들러 커피와 빵오쇼콜라를 €2.90에 사 먹었다. 순례자들이 없는 로컬 카페를 느껴보고 싶어서 그중 구글 평점이 좋은 곳으로 찾아갔는데 크게 다를 건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순례길을 벗어나면서까지 찾아갈 정도는 아니다. 아, 순례자 여권에 찍는 도장은 없었다.
로컬 카페 탐방 실패로 그 후에는 순례길에서 보이는 곳 아무 데나 가게 되었다. 샌드위치 인증샷을 찍던 중 가게 직원이 루카랑 인사하려 했지만 햄바라기는 햄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햄을 갖고 나오셨다면 인기 폭발했을 텐데. 그나저나 매일 주는 햄&치즈의 양이 늘어나고 있다. 루카는 한국 돌아가면 무한산책보다도 하몽이 그리울 것 같다.
강아지도 오고 싶대? 물어봤어?
반려견과 순례길을 걷는 것에 대해 순례자들의 반응이 다양한데 어느 한국인 순례자가 남긴 질문이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당시에는 '주인을 잘못 만난 죄'라고 답하며 웃어넘겼다. 동네 산책 갈 때도 물어본 적이 없고 물어본다 한들 뭘 알아듣겠나. 산티아고 산책이 어떻게 보면 내 욕심이지만 함께 즐기는 순간들은 분명 있다. 평소보다 지치고 발이 아픈 날도 있을 테지.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견생 또한 그렇다.
까미노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용서의 언덕을 가는 길과 일치했다. 파란 하늘 아래 녹색 평원,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들. 피레네산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경사가 있는 코스다. 이 날 동키서비스를 이용하고 배낭 없이 가볍게 다니는 분들이 보였다.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장관을 이루고 한국으로 치면 육백마지기 느낌과 비슷했다. 용서의 언덕 위에 있는 조형물에 스페인어로 'Donde se cruza el ca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바람의 길이 별의 길과 교차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드론 비행을 시도했지만 바람을 이겨내지 못해 결과물이 많이 흔들렸다.
철제 조형물에는 순례자뿐만 아니라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가 있다. 1996년에 설치된 작품이라 하니 루카보다 한참 선배라 할 수 있겠다. 선배님을 앞에 두고 혼자 엎드리다니 많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와 마을로 향하면 성모상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마드리드에서 온 순례자가 선물한 것이다. 그가 이곳에서 앉아 쉬고 있을 때 6살 소녀가 다가왔다. 소녀에게 이름을 묻자 '마리아'라는 답변에 그는 다시 힘을 내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La Virgen de Irunbidea'는 그 순간을 기억하며 세워진 성모상이다.
푸엔테 라 레이나로 가는 길에는 여러 작은 마을들을 지나가게 된다. 우테르가, 무루사발, 그리고 오바노스. 마을을 둘러보기에는 여력이 없어 사진 한두 장만 찍고 스쳐갔다. 마을 이름도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봐서 알게 된 것이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하지 전 마지막 마을(아마도 오바노스)에서 잠시 앉아 쉬었다. 포르투갈길을 걸을 때 신었던 등산화인데 이번에는 왼쪽 발목 부분이 뭔가 안 맞다. 자세히 보니 발목도 조금 부었다. 루카 발바닥 패드는 더러울 뿐 아직 멀쩡해 보인다. 아무튼 우리 진짜 열심히 걸었구나.
Albergue Jakue는 리조트스러운 분위기에 딱 봐도 가격대가 있을 것 같았다. 부킹닷컴을 통해 더블룸을 예약했는데 반려견이 없다면 다인실에 더 저렴하게 묵을 수 있겠다. 순례자 메뉴는 €19.50인데 전채랑 디저트는 뷔페식이라고 한다. 1층에는 bar가 있고 1.2km 거리에 Dia 마트가 있다.
Albergue Jakue
주소 : C. Irunbidea, 34, 31100 Puente la Reina, Navarra
홈페이지 : https://www.jakue.com
비용(24년 4월) : 더블룸 €53, 반려견 추가 €12
방에 들어가면 루카가 마음에 드는 자리로 점프해 자리를 잡는데 이 날은 침대가 높아서 그런지 소파를 선택했다. 그의 선택을 존중해 소파에 침낭을 깔아줬다. 펫 추가 요금이 무려 €12로 순례길 숙소 중에 제일 비쌌지만 침대나 식기 같은 반려견 용품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순례길 4일 차도 무사히 마쳤다. 팜플로나부터 푸엔테 라 레이나까지 23km. 왼쪽 발목이 신경 쓰이기 시작해 내일부터는 크록스를 신으려고 한다. 순례견도 다리가 아플 텐데 묵묵히 걷는 거겠지? 끝까지 파이팅 하자.
더 생생한 기록은 아래 영상에서 4K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