⁰한국에 금방 왔을 때 오른쪽으로 돌리면 찬물, 왼쪽으로 틀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게 참 편했다. 샤워꼭지를 틀면 뜨거운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게 너무 좋아서 하루에 두 번씩 샤워를 했다. 이제 그런 당연한 일상에서 산 지 10년이 넘어가니 모든 것이 익숙해져 버렸다. 프랑스 내 집 근처에서 배관 공사를 하느라 며칠 전 여섯 시부터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딱 16시간 동안 단수가 되었다. 어제 딱 하루 저녁 물이 없이 살았는데 어떻게나불편하던지. 북한 생각이 났다.
북한은 아파트마다 물을 틀어주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커다란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하루 이틀 그물을 걸어서 솥에 끓여서 필요할 때마다 써야 한다. 그것마저도 높은 층에 거주하는 세대들은 수압이 낮아서 물을 받을 수도 없다. 내가 살던 은덕은 4층 건물이 주를 이루고 6, 7층 고층 아파트도 있었다. 서울에 비하면 6, 7층은 빌라 수준이지만, 북한 지방 도시에서는 높은 고층 건물에 속한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식용수를 길어서 마시거나 써야 한다. 물이 나오는 지역으로 가서 양동이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거나, 지게로 양어깨에 걸어서 6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이것 참 힘들다. 시골 지역은 그나마 좀 사정이 낫다. 시골은 아파트가 없고 대부분의 농장원들이 주택에 거주한다. 시골은 특성상 우물을 쉽게 파낼 수 있다. 시골 사람들은 마을 공동 우물에서 식수를 길어다 먹는다. 그리고 강가에 나가서 빨래를 한다. 하지만 북한 시골들은 농사를 지을 때 비료가 없어서 인분을 사용한다. 인분이란 똥이다. 주택마다 마당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데 가족들이 화장실에 볼일을 본 것들을 모아 겨울에 보내서 썩히거나 끓여서 밭에 퇴비로 사용한다. 농업용수와 식수가 제대로 구분조차 안 되어 있고 시멘트나 기타 건설 재료가 충분치 않은 북한은 댐을 제대로 건설할 수 없고 수해에 취약하다. 강에서 범람한 물은 농업 토지들을 휩쓸고 가고 기타 오염된 물이 우물로 들어가고 식수를 오염시킨다. 여름만 되면 각종 수인성 감염병들이 유행한다. 북한은 유아 사망률이 굉장히 높다. 수인성 감염병들은 특히 장이 튼튼치 못한 어린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북한의 대도시의 물 부족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북한은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이 오래됐다. 특히 대도시는 일제 때 만들어 놓은 것을 보수해서 사용했다. 1970년대 소련의 경제 지원을 받을 때 상하수도 시설들을 확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은 상하수도 시설도 만성적인 전력 부족으로 제대로 가동을 할 수 없다. 오래 멈춰있던 설비들은 재가동하기 어려워졌다. 인민들은 도시 주변에 우물을 파서 식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식용수용 우물에 폐수가 흘러들어 간다. 말하자면 똥물이 흘러 들어간다는 뜻이다.
2002년 북한 전역이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다. 재래식 화장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북한의 특성상 온갖 오염수가 우물에 흘러 들어갔고, 땔감이 부족해서 오염된 물을 제대로 끓이지 않고 퍼마신 사람들이 전염병을 앓게 되었다. 당시 콜레라가 유행했었다. 콜레라는 건강한 사람도 걸리면 탈수로 사경을 헤매는 병이다. 북한 사람들처럼 만성적으로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가정에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면 대문에 커다란 종이에 빨간 글씨로 '콜레라’라고 써 붙였다. 기초적인 지식이 없었던 우리는 그 집 대문 근처에도 안 가려고 애를 썼다.
두 번째로 유행하던 병은 장티푸스, 파라티푸스라는 병이었다. 이것도 돌림병인데 식수가 오염이 되면서 전염병으로 번졌다. 이 병들 때문에 사람들이 참 많이 죽었다. 나도 열세 살 때쯤 파라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려서 병원을 찾았는데 파라티푸스 판정을 받고 전염병 병동에 격리가 되었었다. 북한 병원은 일제 때 지었던 건물을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은덕 군 병원 전염병 병동은 일제 때 지은 건물에 환자들을 수용했다. 10미터가 넘는 기다란 어둑 컴컴한 복도를 지나가면 환자를 수용하는 입원실이 있다.
침대는 여섯 개씩 세 개 줄이 있었다. 나는 소아로 구분되어 소아 입원실에 입원했었다. 옆에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쌍둥이 자매 중 언니가 입원해 있었다. 나는 증상이 심한 환자로 분류가 되어 병원에서 해열제를 맞았다. 옆에 쌍둥이 언니는 나보다 늘 열이 일도 가량 낮아서 해열제를 맞을 수 없었다. 둘이서 함께 사경을 헤매다 해열제를 맞으면 4시간 정도는 제정신으로 보낼 수 있어 가끔 대화도 하고 퇴원하면 만나기로 약속도 했었다. 나는 고열로 인해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옆에 친구가 없었다. 침대는 치워지고 매트리스도 사라졌다.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옆에서 나랑 수다 떨며 보내던 친구가 죽었다고 했다. 하루 전까지 옆에 누워서 웃고 떠들면서 우리가 다 나아서 건강하게퇴원하게 되면, 평생 친구로 지내자고 약속하던 친구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렸다.
나는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쩌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였지만, 아버지가 담당 의사에게 뇌물을 줬다고 했다. 쌍둥이 언니는 집이 가난해서 뇌물을 줄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직원을 고용하고 월급을 줘서 사회를 돌린다고 하면, 북한은 뇌물로 굴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에서 배급을 안 주면 의사를 비롯한 고급 일꾼들도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 그러니 숟가락 든 놈마다 조절해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간부들도 많았다.
북한은 전 국민에게 무상의료 혜택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무상의료를 사회주의 제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소개한다. 전 국민 무상의료는 1948년부터 1990년대까지 어느 정도 작동했다. 우리는 돈이 없어도 병원을 갈 수 있었다. 긴 대기시간은 있었지만, 무상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면서 공산권 나라들의 지원이 끊겼다. 병원에는 약재가 부족해졌다. 의사들은 진료를 해주고 약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주며 시장에서 사라고 했다. 수술이나 고급 의료기술이 필요한 치료는 병원 의사들이 기술적으로 도와주었지만, 실이나 가재천, 수술에 필요한 약은 환자가 직접 구해야 했다.
내가 파라티부수에 걸렸을 때 의사가 아버지에게 중국산 '정통편'이라는 먹는 해열제를 사라고 했다. 우리는 그나마 가족들이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가족들의 도움으로 나의 통증을 완화시켜 줄 여러 가지 약들을 시장에서 비밀리에 구해서 의사에게 건넸다. 나의 외가는 함경북도 새별군 종산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새별은 북한에서 독초로 유명한 지역이다. 독초는 담뱃잎이다. 북한에서는 말보로와 같은 필터담배를 여과 담배라고 하며 고급 담배로 분류한다. 일반 사람들은 신문지나 담배 말 이용 종이를 잘라 잘게 자른 담뱃잎을 넣고 말아 피웠다. 담배 중에서 새별산 독초 담배는 독한 맛으로 유명하다. 약한 담배 맛에 익숙 한 사람들은 한 모금만 빨면 얼굴색이 변할 정도였다. 외할머니는 매해 가장 좋은 독초를 먼저 따서 자연광에 말려 아버지에게 보내주곤 했다.
아버지는 당일꾼이나 의사나 정부 관련 도움이 필요할 때면 말린 독초입사귀를 크게 한 묶음씩 여러 묶음을 신문지에 싸서 뇌물로 주곤 했다. 뇌물은 북한의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방법이다. 국가에서 배급을 해주지 않으면 의사를 비롯한 고급 일꾼들도 먹고살 수 없다. 그래서 숟가락 든 사람마다 뇌물을 받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뻔뻔하게 뇌물을 요구하는 간부들이 많았다. 요즘은 돈으로만 뇌물을 받는다고 한다. 과거에는 세이코 시계를 뇌물로 쓰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처럼 북한의 뇌물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북한에는' 왕진'이라는 특별한 의료제도가 있다. 도로 상황이 좋지 않고 119 같은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아픈 환자가 직접 병원에 갈 수 없을 때 의사가 환자의 집에 방문하는 제도이다. 왕진을 이용하는 지역은 농촌 지역이 많다. 왕진을 요청하면 의사가 방문해 준다. 밤 12시에도 환자 가족이 요청하면 환자의 집을 찾아가고, 새벽녘에 자다 깨서 잠옷에 외투만 걸치고 왕진 가방을 들고 마을 전체를 매일 돌아다니는 의사들도 있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의사나 노동자나 같은 월급을 받는다. 의사들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힘든 의료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정부의 배급 시스템이 무너지자 의사들도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뇌물을 받기도 했다. 의사 중에는 '뇌물’을 거절하고 장군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