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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Oct 13. 2023

꽃제비들의 삶과 죽음을 담은 라진 밤거리

꽃길을 꿈꾸던 꽃제비들의 운명 1

라진은 깨끗하고 세련된 도시였다. 시내에는 화려하고 높은 건물들이 즐비했다. 중국인 러시아인 등 다양한 외국인들이 붐비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건 여자들의 옷차림이었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어깨를 드러내는 짧은 옷차림은 전혀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누런색 인민복이나, 남색 교복 차림이 익숙했던 나에게 아버지는 늘 여자는 허벅지를 드러내면 절대 안 된다고 가르쳤다. 도시 곳곳에는 이국적인 간판을 단 상점과 식당 그리고 호텔들이 번창 중이었다. 그렇게 화려한 도시는 처음 보았다. 라진은 주로 중국 조선족들의 투자를 받아 건물을 올리고 도로를 정비했다.


밤거리는 눈부셨다. 밝은 조명이 라진 시내를 비추고 있었다. 가게들마다 상호를 화려하게 돋보이게 하려고 네온등을 설치했다. 나는 네온등을 난생처음 보았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평양의 밤거리를 찍은 화면에서나 봤다. 라신의 밤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네온등의 깜빡임은 우리에게 이 도시에서라면 생존할 수 있다고 확신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라신 시내 중심에는 큰 사거리가 있었다. 사거리를 사이에 두고 남서방향으로 남산 호텔이라는 고급 호텔이 있었다. 남산 호텔에는 중국인 사업가들, 장기간 여행을 하는 관광객, 러시아 사업가들, 라진 무역성 직원들 그리고 보위부 직원들이 묶고 있었다. 남산 호텔 바로 옆에는 고급 미용실이 하나 있었는데 중국인들과 평양 사업가들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미용실을 끼고 우회전을 하면 라진역으로 향하는 넓은 도로가 있었는데 도로 옆 오른쪽으로 연길 상점이라는 고급 상점이 있었다. 연길 상점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가격도 대단히 비쌌다.


연길 상점을 이용하는 주 고객은 사업차 라진에 나와 장기 거주하는 중국 조선족들이나, 무역성 직원들이나 그 가족들, 평양 사람들, 고급 물건들을 취급하는 장사꾼들도 자주 이용했다. 그리고 연길 상점을 자주 이용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꽃제비 무리들이었다. 연길 상점에서는 용모가 출중한 조선족 아가씨가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난잡한 옷차림의 우리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유통기한이 지나 팔지 못하는 상품들을 우리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우리 꽃제비들은 주로 인민폐를 수익으로 벌었는데 연길 상점은 환전창구가 따로 있었다. 중국사업가나 장사꾼들을 상대로 은행역할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인민폐를 북한 돈으로 바꾸기 위해 연길 상점을 자주 이용했다.


꽃제비들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열 살이었고, 동생은 여덟 살이었다. 14세 미만의 소년소녀들은 주로 중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구걸을 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15세 이상의 남자들은 쓰리꾼(소매치기) 중국 관광객들 틈에서 지갑을 훔쳐서 먹고살았다. 전문 차 털이 꾼들도 있었는데 조선족 장사꾼들의 차를 털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부류들이었다. 15세 이상의 여자들은 배밀이라고 불렀는데 고급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이 손님을 응대할 때 바쁜 틈을 이용해서 투명한 유리로 장식된 매장 위에 배를 올리고 안쪽 유리미닫이문을 열고 진열된 상품을 훔쳐서 싼값에 팔아먹고 살았다.


구걸팀을 '인민비게바’라고 불렀는데, 구걸팀은 각 무리들마다 활동하는 구역이 달랐다. 라진에서의 꽃제비 생활은 굶주리지는 않았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북한 어린이 꽃제비들에게 음식을 나눠줬고, 돈도 잘 줬다. 가끔은 고급 진 열대과일도 얻어먹었다. 땅콩이나 소시지 같은 일반 북한 사람들은 구경도 못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라면이나 김치, 그리고 해바라기씨, 절인 달걀, 간장에 조린 닭발, 멋진 포장으로 유혹하는 중국 간식들, 그리고 갖가지 사탕과 초콜릿은 질도록 얻어먹을 수 있었다. 구걸이 잘 안 되는 날은 쓰레기장을 뒤져도 먹을 것이 넘쳐났었다. 중국 사람들은 물건이 섞어 나는지 멀쩡한 물건들도 자주 버렸다. 일회용 용기나, 포크 같은 것도 아직 한창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버려져 있었다.


라진에서 꽃제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로 추위였다. 북방의 겨울은 서울이나 프랑스 겨울과 비교할 수 없다. 혹한기가 참 무서울 정도로 춥다. 영하 10도는 온화한 날씨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겨울 날씨는 추우면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도 많다. 4월 초까지도 산 북향 쪽에는 흰 눈이 쌓여 있을 정도다. 우리가 라진에 도착했을 땐 2월 말에서 3월 초로 넘어갈 때였다. 혹한기는 지나갔다고 했지만, 2월의 날씨도 정말 추웠다. 이건 그냥 추위가 아니라 자칫 얼어 죽을 수도 있는 추위였다. 거기다 라진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동해바다 바람은 살을 에는 것 같았다. 한 밤 추위는 그야말로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내 동생을 꼭 끌어안고 온기를 나눴다. 그래도 추웠다.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내 이빨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부딪혔다. 우리는 일어서서 각자 뛸 수 있는 최고의 속력으로 뛰었다. 몸이 조금 더워지는 것 같았지만, 이내 추위가 몸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연길 상점 맞은편에 일반 주택용도로 지어진 아파가 보였다. 아파트 중앙 정문을 열어 보니, 다행히 방범장치가 안 걸려 있었다. 아파트 복도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 살글살금 3층으로 올라갔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어 바람이라도 불지 않아 포근하게 느껴졌다. 어느 집 출입문 앞에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아직 숯불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화로 주변으로 빼곡히 둘러앉아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냈다. 꽃제비들이 아파트 복도에서 잠을 잔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다음날부터 아파트에 방범장치가 걸렸다. 우리는 쓰레기 장에서 폐품들과 비닐 조각, 종이 박스들을 모아 등에 지고 산기슭으로 향했다. 라진시에서 선봉 시로 넘어가는 낮은 야산이 하나 있었는데, 라진 시내에서 멀지 않았다. 우리는 야산 기슭에 작은 누더기 임시 텐트를 지었다.


나뭇가지를 주어 기둥을 만들고, 쓰레기장에서 주은 박스와 비닐을 덮어 바람을 막았다. 한밤중에는 가랑잎과 나무 가지들을 주어 불을 피워 온기를 만들었다. 불이 꺼지지 않게 교대로 잠을 잤다. 아이들은 텐트에서는 비닐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면 몸에 체온을 보존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도 추운 친구들은 모닥불 주변에 모여들어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다시 텐트로 들어가 잤다. 유난히 추운 날이 있었는데 나는 모닥불 너무 가까이에서 잠을 자다가 방한복 옆구리 쪽 대부분을 태웠다. 시커멓게 타 버린 천 조각들은 뭉쳐서 흉측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타버린 천 사이로 솜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변변한 옷이 없었던 나는 두 달 내내 따듯해진 봄까지 그 방한 목을 입고 다녔다. 추위를 극복하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법을 우리는 찾았다.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다. 내년에 다가올 혹한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제 며칠만 더 버티면 겨울도 가고 곧 꽃피는 봄이 오니, 꽃제비들은 꽃길을 걷게 생겼다고 마냥 좋아했다. 우리는 자유로웠고, 구걸로 살아간다는 자괴감도 없었고, 웃고 떠들고 재밌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러다 우리의 일상을 깨버리는 사건이 생겼다.


불철주야 바쁘셔서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시고 매일 쪽잠을 주무신다는 우리 장군님께서 시간이 나셨는지, 나라에 부모 잃은 고아들이 너무 많다는 보고를 받으셨다고 꽃제비들을 다 잡아서 소속된 각도시군에서 책임을 지고 잘 키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6월 17일 날 말씀이 계셨다해서 6.17 상무라고 불렀다. 6.17 상무는 매해마다 이름이 바뀌었었다. 김정일이 마음이 바뀔 때마다 말이 바뀌었고, 말이 바뀔 때마다 상무의 명칭이 바뀌었다. 상무의 주역할은 도시의 역전이나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을 모두 잡아한 곳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도시마다 꽃제비 수용시설이 달랐다. 당시 라진시의 꽃제비들을 수용하는 시설은 청계동이라는 지역이었다. 청계동은 바로 옆에 시장이 있었다. 꽃제비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주로 시장이라 상무들은 시장에 잠복하고 있다가, 행색이 초라한 아이들을 잡아 시장 바로 뒤쪽 임시 시설에 수용했다. 수용시설의 삶은 처참했다. 한 끼 식사가 50그람이나 될까? 라진은 꽃제비 소탕에 가장 앞장섰다. 라진꽃제비들은 더 심한 취급을 받았는데, 죄명이 장군님의 영상에 먹칠을 한 죄였다. 꽃제비들의 중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구걸 때문에 사진도 찍히고 나라의 가난이 세계에 알려졌다는 거다. 그게 우리 때문이라는 거다. 우리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구걸로 배를 채워 장군님께 수치를 안겨드렸단다. 이 말도 안 되는 죄 때문에 아이들은 자주 구타에 노출됐다.


국가에서 턱없이 작게 지원해 주는 식량이지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힘든 시기였던 지라 직원들이 착복했다. 숟가락 든 사람마다 조절해가다 보니 정작 꽃제비 아이들은 죽지 않을 만큼의 식량만 배급받았다. 그런 식량을 장기간 먹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꽃제비들은 6.17 상무들을 피해 숨어 다녀야 했다. 그들에게 잡히면 우리는 함경북도 도 소재지인 청진직결소로 끌려가야 했다. 청진직결소 생활은 더 끔찍하다는 소문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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