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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자따봉 Oct 07. 2023

D+10 고양이도 집사의 인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 사진은 송이에게 실시간으로 한 대 맞은 상황을 담은 사진이다. 경멸하듯이 보는 표정, 언제든 한 대 때릴 수 있다는 의미로 살짝 들어 올린 왼발. 송이는 우리 집에 온 이후로 가장 냥빡친 상황을 마주했다.


비록 송이는 화가 잔뜩 났지만, 집사인 나로서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 사유는 이렇다. 송이가 어제부터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나는 송이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옷장 속에서 숨어있던 송이는 열심히 숨어 다니기 시작했고, 그런 송이를 나도 포기할 수 없기에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다 송이가 우리의 암묵적인 DMZ 구역으로 갔다. 바로 송이의 숨숨집이다.


어지간해서는 송이가 숨숨집으로까지 숨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 너무 싫고 귀찮으면 옷장을 넘어 숨숨집에 쏙 들어가곤 한다. 다른 날이면 나도 그런 송이의 의사를 존중해서 숨숨집에서 쉬고 있을 때면 절대 터치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송이 감기 증상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송이는 서로가 정한 규칙을 깨고 접근하는 나에게 경고의 의미로 하악질을 날렸다.


한 번, 두 번. 두 번의 하악질이 끝나고도 내가 떠나지 않자 바로 송이의 솜방망이가 날아왔다. 세상에,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아무리 내가 숨숨집까지 찾아가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고 할지 언정, 어떻게 발톱을 세우고 날 때릴 수 있단 말인가. 평소에 이런저런 이유로 잘 다치는 편이라 피가 나도 크게 놀라지 않는데, 송이 발톱이 지나간 크기에 비해 피는 쉬지 않고 나서 당황스러웠다. 이건 아니지. 집사이자 보호자로서 송이를 엄격히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고양이가 상전이라지만, 폭력은 안 될 일이다. 집사도 절대로 고양이에게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되지만, 고양이도 솜방망이를 날리더라도 발톱은 감추어서 유혈사태가 나지 않도록 방지해야 한다. 길생활 3년 차 고양이기에 인간하고의 관계 맺기가 서투를 수 있지만, 그래도 폭력은 가만히 두고 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사람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지만, 우리 송이는 똑똑이 고양이이기 때문에 가정교육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우선 피가 나는 손부터 닦았다. 다행히 송이한테 맞을 때 소리를 지른다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침착하게 피를 물티슈를 뽑아 정리하고,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왔다. 피가 더 나지 않도록 지혈을 하고, 숨숨집 앞에 앉아 송이와 눈을 맞추고 송이에게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송이, 엄마한테 이러면 돼, 안 돼. 송이가 화를 낼 수는 있어. 근데 발톱까지 세우고 엄마 때리는 게 말이 돼? 이거 봐. 엄마 지금 피나잖아. 피 보여?"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송이 앞에 대고 피 묻은 물티슈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송이의 시선이 물티슈의 움직임에 따라 잠깐 흔들렸다. 순간 사냥놀이랑 착각하고 있나 싶어 불안해졌다. 송이의 표정을 보니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고양이들이 짓는 특유의 표정인 '뭐.'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반성이라고는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표정을 보니 나의 말을 잘 알아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바탕 훈육을 다 끝내고 나서, 송이의 숨숨집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바로 도망갈 줄 알았던 나의 생각과 달리 송이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다시 옷장 밑으로 돌아갔다. 이건 분명 혼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묘의 행동이었다. 비록 초보 집사지만 차분하고 엄격하게 송이의 교육을 마무리했다.


한 편으로는 과학적으로 고양이가 사람의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현타가 왔다. 비록 고양이는 사람이랑 언어적 의사소통은 불가능할지언정, 아까의 송이는 분명 자신이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혼나는 중이라는 것을 인지한 모습이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상황이 사실인가에 대해 확신을 갖고자, 고양이 카페에 글을 올렸다.


‘고양이도 혼을 내면 알아듣나요?’


누가 봐도 초보 집사가 올린 글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질문한 것 같아 다시 글을 지우려고 하는데, 댓글 알람이 울렸다. 다른 집사의 경험담들이 댓글로 달렸다. 심지어 어떤 분은 고양이를 어떻게 혼내야 하는지에 대한 팁까지 알려주셨다. 그래, 우리 송이도 반성하고 있지는 않아도 내가 피가 나서 아팠다는 건 이해할 거야. 송이가 또 솜방망이를 날릴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발톱을 감추고 때리는 예절을 갖춰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구조자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오줌 냄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송이가 이번에 옷장 밑에 깔아 둔 담요에 오줌을 쌌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구조자님은 송이가 또 오줌을 가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해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송이의 담요에서 늘 지독한 냄새가 났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렇다, 송이는 지금까지 꾸준하게 담요에 소변을 보아온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건 처음인지라, 옷장 밑에 깔아 둔 담요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도 원래 고양이 냄새가 그런가 보다 했다. 한번 세탁기에 돌리고 나니 냄새가 꽤 사라져서, 고양이 체취인 줄 알고 있었다. 또 화장실에서 꾸준하게 감자를 캐왔기에 담요 냄새 원인이 고양의 오줌일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방 전체에서 오줌 냄새가 난다는 나의 말에 무언가 이상히 여긴 구조자님 덕분에, 원래 고양이가 사용하는 물건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애인이 옷장에 걸린 옷들에서 고양이 오줌 냄새가 난다고 했었던 게 생각이 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송이가 화장실을 가지 않고 담요에 계속 오줌을 싸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급히 옷장에 걸린 옷들을 모두 꺼냈다. 갑자기 집이 통째로 사라져 송이는 놀라서 숨숨집으로 숨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던 공간이 한 번에 사라진 송이도 놀랐겠지만, 옷장에 걸려있는 옷들을 모두 버리게 생긴 나도 만만치 않게 다급했다.


옷을 꺼내어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몇 가지의 옷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멀쩡했다. 물론 송이의 똥과 오줌 냄새로 찌들어있다는 것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간접 접촉인 상태라면 세탁기에 빨면 어떻게 살려볼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동안 옷장 속에서 소변까지 해결하며 안락하게 지냈을 송이에게 미안하지만, 송이는 이제 조금 덜 편해질 필요가 있었다.


사실 송이가 배변 관련해서 실수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송이가 사고 치는 형태를 고양이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서 하는 스프레이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모래가 불편해서 화장실을 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자연에 가까운 부드러운 모래를 쓰고 있고, 또 송이가 모래 화장실을 잘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모래 화장실을 잘 쓸 수 있지만 송이가 자신의 의지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송이의 행동들을 돌아보면서 송이가 왜 실수를 할까 찬찬히 돌이켜봤다. 인터넷에서 찾아봐도 송이처럼 화장실을 잘 쓰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배변 실수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제 내가 답을 찾아야 할 차례였다. 송이가 길고양이 출신이라서 화장실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한 번도 분리된 모래 화장실을 써 본 경험이 없는 친구이기 때문에, 아무 데서나 볼 일을 보고 다시 떠나는 것에 익숙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정리하면 이미 옷장 안에 너무 안락해서 구태여 화장실을 가는 것처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필요를 못 느끼는 듯싶었다.


그리하여 송이의 옷장이라는 커다란 숨숨집은 통째로 사라지게 되었다. 가만히 옷장 안에서 쉬고 있던 송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갑자기 집이 통째로 사라지게 되어 깜짝 놀란 송이는 방에서 튀어 올랐다. 옷장 바로 옆에 숨숨집이 있고, 송이가 간간이 잘 쓰던 곳이기 당연히 송이가 그쪽으로 갈 줄 알았다. 웬걸, 송이는 방문을 여는 선택을 했다. 즉, 거실방으로 이민을 가길 택했다.


이 전에는 거실방을 가본 적이 없어 어디에 숨을지도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면,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 방을 몇 번 둘러보았는지 이번에는 바로 숨을 곳을 찾았다. 비록 송이는 거실로 도망가는 비상 상황에서 어디로 숨을지 예행연습을 마친 상황이었지만, 이에 대해 나와 상의한 적은 없기에 나는 송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송이가 숨을 법한 방의 구석을 모두 뒤지다가, 드디어 송이가 있는 곳을 찾았다. 바로 소파 밑이었다. 정확히는 접이식 소파 밑에 수납형 박스를 놓아두었는데 수납형 박스와 소파 사이에 끼어들어가 있었다. 인간은 도저히 손을 닿을 수가 없는 곳이라는 점에 있어 너무 완벽한 숨숨집이어서 기가 찼다. 자신이 안전하다는 걸 잘 아는 것인지, 송이는 여유롭게 앞다리를 꼬고 앉아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송이는 새로 찾은 숨숨집이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먼지가 가득한 소파 밑에 숨어 지내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거실방에는 화장실이 없어 대소변 테러를 할 확률이 높았다. 새로운 매트리스에 이어 새로운 소파마저 들이는 상상을 하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겨우 찾은 새로운 숨숨집마저 없어지게 된 송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송이가 숨을 수 없도록 소파를 펼쳐 침대로 만들었다. (송이 기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송이는 다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송이 기준에서는 도망 다닌 것이지만, 인간의 나의 입장에선 애가 갑자기 순간 이동을 하더니 사라진 상황이었다. 소파 밑을 아무리 뒤져도, 송이가 갈 수 있을 법한 곳을 찾고 또 찾아도 애가 없었다. 시간은 이내 흘러 스터디에 참여할 시간이 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실 어딘 가에 숨어있을 송이와 함께 온라인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스터디 구성원들에게는 애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고양이가 튀어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송이 생각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송이가 어련히 나오겠지 싶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송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양이와 지내며 느끼는 최악의 순간이 언제인가 물어본다면, 대소변 실수를 할 때도 애가 밥을 먹지 않을 때도 아니다. 바로 애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을 때다. 애가 아파도 일단 내 눈앞에 있다면 약을 먹이던 병원에 데려가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갑자기 사라진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와중에 아이가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고, 전선을 뜯어먹거나 세제를 핥아먹는 등의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다.


결국 패닉에 빠진 인간에게 편두통이 찾아왔다. 회의에 참여할 수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져서 중간에 회의를 나왔다. 이후 본격적으로 거실을 뒤지며 송이를 찾았는데, 숨을 수 있을 법한 모든 곳을 다 샅샅이 뒤져도 애가 없었다. 당연하다. 그때 송이는 이미 거실방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나는 송이가 지내는 옷방이라도 치우자 싶어 옷방으로 갔다.


옷장 옆에 있던 숨숨집의 위치를 옮기려고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리는 순간 송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회의를 하고 있던 사이에 송이는 조용히 원래 있던 거실방에서 나와 옷방의 숨숨집에 갔던 것이었다. 찾았다!라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송이는 숨숨집에서 튀어나와 다시 거실방으로 사라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루 종일 없어진 송이를 찾자마자 다시 송이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는 포기하기로 했다. 현관문이나 대문이 열려있는 것도 아니고, 송이가 도망갈 수 있는 창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배고프면 밥자리 어디 있는지 아니까 알아서 먹겠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거실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널브러진 옷들을 정리하고자 옷상자를 열었다. 설마 싶었는데, 거기 송이가 있었다.


이쯤 되니 송이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놀래 뒤집어진 인간과 달리 송이는 익숙하다는 듯 총총총 걸어갔다. 하루 종일 본인 찾겠다고 고생한 인간 따위 별일 아니라는 듯, 송이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래, 네가 좋다면 다행이지. 그렇게 오늘 집사로서의 나의 하루도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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