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팔자따봉 Oct 20. 2023

D+15 송이야, 언니가 계속 글을 써도 될까?

만약 당신이 하루 종일 유심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집에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집사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집사 중 한 사람이 되어 하루 종일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송이랑 같은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펫 카메라 영상을 보고, 지금도 노트북 한편에 핸드폰 화면을 놓아둔 채로 글을 쓰고 있다.

처음 카메라를 설치했을 때, 송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설레어서 하루 종일 핸드폰 화면만 보았다. 송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숨숨집에서 지내기 때문에, 밥그릇이나 화장실 앞에 설치된 카메라에 송이가 담기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송이가 없는 빈 화면을 바라보게 되지만, 그래도 언젠가 송이가 숨숨집에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11시가 되기 10분 전, 송이는 드디어 숨숨집에서 나왔다. 보통은 11시 이후가 되어야지 밥을 먹으러 나오는데 오늘은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바로 참치가 담겨있는 그릇으로 직행한 송이는 한참 파묻고 정신없이 참치를 먹었다. 건사료를 먹을 때에는 중간에 몇 번씩 주위를 경계했는데, 참치는 무척이나 맛있었는지 주변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항생제를 탔는데도 어쩜 그렇게 맛있게 먹던지, 기특하면서도 귀여웠다.

며칠 전 송이의 혈뇨가 의심되어서 카메라로 송이가 화장실 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송이가 그동안 이불에 오줌 테러를 해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비록 커다란 크기의 화장실이었지만, 경계심이 많은 송이에게는 영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주위를 볼 수 없어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는 송이의 모습을 보고, 바로 새로운 화장실을 결제했다. 바로 전설의 미친 화장실, 김명철 수의사가 개발한 제품을 구매했다.

비록 가끔 충동구매의 유혹에 빠지긴 하지만, 마케팅 전공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상에서 지갑을 털어가기 위한 기업들의 전략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홍보광고학과 졸업생도 집사가 되자, 그동안 배운 마케팅 이론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수의사가 개발했다고? 그 한 문장을 만남과 동시에 카드 결제창이 열렸다.

우선 결제부터 하고 나서 제품에 대한 설명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화장실의 모든 각도마다 길이가 몇 cm이고 왜 당신의 고양이를 위한 완벽한 제품인지 설명이 나와있었는데, 그 숫자들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수의사님과 개발팀이 수차례 실험하며 완성시켰을 최적의 숫자를 카드결제 한 번으로 받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화장실이 도착하기 전까지 또 송이가 이불테러를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저녁이 되었을 때쯤, 드디어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왔다. 26년쯤 인생을 살다 보면 택배박스를 뜯어보더라도 그리 새롭다거나 신선한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바다를 넘어 한국에 오기까지 몇 달을 기다려 만나게 되더라도, 상자를 뜯으면 결국 그 또한 현실세계 속 물건에 불과함을 깨닫곤 한다. 하지만 포장을 뜯고 마주한 ㅁㅊ 화장실은 보자마자 이것은 보통 물건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커다란 크기에 반비례하는 경량감이 이 화장실이야말로 고양이 화장실 유목민의 정착지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게 했다.​


아무리 인간이 감탄했을지라도, 중요한 건 송이가 잘 사용해 주는지였다. 숨숨집에 들어간 송이가 나오길 기다리길 몇 시간, 드디어 송이가 나왔다. 송이는 열심히 참치를 먹고 나더니, 늘 하던 대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에 들어간 송이는 위로 고개를 쏙 내밀더니 밖을 보았다. 그동안 사람을 경계하느라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침대에 올라가서 볼일을 봤던 것이라는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송이의 머리만 화장실벽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 상품 설명에 적혀있던 숫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미천한 집사인 나로서는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쿠폰을 끌어모아 값을 치렀지만, 김명철 수의사님의 고양이를 향한 사랑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를 자본가를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며 냉소적인 태도로 바라봤는데, 고양이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자본을 만나 탄생한 화장실의 이데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이불 빨래를 하고 깁스한 발로 매트리스를 옮겨 버리던 지난 시간들을 되새기며, 내가 자본주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자본주의의 주께서 강림하여 모든 집사들을 위한 은총을 내리시니, 우리는 이것을 ‘ㅁㅊ 화장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나이다… (야옹)




"언니 바빠?"

단 4글자의 메시지로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갖은 상상을 하게 되는 문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이렇게 카톡을 보낸 이유는 며칠 전부터 만개한 불안을 마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활짝 피어오른 불안의 씨앗은 바로 꿈이었다. 에세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

처음 송이와의 일상을 일기로 쓰게 된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였다. 매일 송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면 '아휴 팔출불이네'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아주 소소한 것까지 모두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글을 쓸수록 마음속 깊이 묻어둔 씨앗이 자라났다. 나도 에세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 언젠가 출판사에 의해 책을 정식 발매하고 싶다는 꿈, 그런 꿈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은 단단한 외피를 뚫고 싹을 돋아내는 것부터 시작한다. 스쳐 지나가는 헛바람에 얼어 죽고 싶지 않아서 무의식 어딘가에 깊이 묻어두었었는데, 이제 세상을 마주할 때가 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시간을 볕 들지 않는 어둠에서 보냈던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전문가들이 채점한 후 나의 글에 매겨진 점수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의 성적표에 적혀있는 평가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만약 출판사 관계자가 내 글을 보고 '아마추어 티가 많이 나네요' 한마디를 남기더라도 다시 펜을 잡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많은 사람과 달리, 나는 내가 쓴 글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가끔 수년 전에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곤 하는데, 비록 어설픈 부분은 좀 있을지언정 지금 읽어도 참 좋았다. 대부분의 글은 대자보로 게시하기 위해 쓴 글이었고, 사람들은 학교 광장에 이름을 걸고 글을 쓴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점수를 후하게 주었다. 따라서 살면서 글을 못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드물었고, 그리하여 냉혹한 평가를 받으면 얼어 죽는 병약한 글쟁이가 되었다. 다만 문제는 ‘~한 것 치고 잘 쓴 글’과 작가로서 등단할 법한 실력을 갖췄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작가로 연재 중인 친한 언니에게 연락을 하게 된 것이다.

“나 에세이 작가 하고 싶은데, 내 글 어떤 것 같아?”

보통 같았으면 다른 이야기를 하다 슬그머니 별 것 아닌 척 끼워 넣었을 문장을 직구로 내리꽂았다. 한강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던 언니는 친구를 잘 못 둔 탓에 갑자기 날벼락을 맞았다. 언니는 고민하더니 진실을 원하는 것인지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물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진짜 별로라고 하면 상처받고 절필할 수도 있다고. 그렇다, 사실 내가 원하는 답은 냉철한 판단에 기반한 yes였다. 재능이 흘러넘쳐서 당장 책을 내라는 그런 말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매일 세네 시간씩 머리를 쥐어짜며 글을 쓰는 일을 계속하더라도, 시간 낭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인생은 A와 B 중에서 C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했던가. 언니는 내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싶었는데, 그 다음 말이 더 충격이었다. 글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정답은 ‘글을 쓰면서 재밌어야 한다 ‘였다. 또 초심을 잃지 말라고도 했고, 글을 잘 쓰는 것보다 매일 내가 목표한 분량을 쓰는 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언니에게는 그동안 멈추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마인드셋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참 낭만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문제는 낭만이라는 한 여름밤에 마시는 얼그레이 하이볼 같은 것이라는 거다. 밤에 마감을 하지 않아도 되며, 술에 취해도 집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칵테일바가 있어야 하며, 또 기분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쓸 수 있을 때, 우리는 낭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당장 아무것도 이루어낸 것이 없는 나 같은 인간의 삶에서 낭만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꾸준히 노력하는 자에게는 꿈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 26살의 나는 이제 성인을 위한 만들어진 산타할아버지를 믿지 않는다. 흐르는 눈물을 꾹 참은 착한 아이에게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이 온다는 그런 존재. 성인이 되고 마주한 세상에서는 크리스마스날 정신과 약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운이 좋더라도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모두가 듣기 지겨운 케케묵은 술주정만이 남는다.

그리하여 나의 첫 질문은 ‘글을 계속 써도 될까요?’였다. 잃을 것이 없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는 순 거짓말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남은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 그동안 겨우 만들어 놓은 작은 모래성 마저 냉혹한 시장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 까봐 두려웠다. 그나마 내가 자신 있다고 생각한 게 글 쓰는 일이었는데, 내가 그동안 사랑해 왔던 시간들이 쓸데없이 시간만 버린 일이 될까 두려웠다.

현실과 시간을 저울질하는 나에게 언니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넌 글이 안 팔리면 글을 그만 쓸 거야?”

그 질문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은 “아니, 그래도 쓰겠지”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까 언니가 왜 글을 쓰면서 재밌어야 한다고 했는지, 왜 ‘잘 팔리는 글’에 대한 말을 안 했는지.


어차피 나는 살다 보면 또 마음속에 글자들이 차올라, 기어이 뱉어내고야 말 것이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건 창작이 아니라 토해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몸에 축적된 감정들을 다 토하고 나면, 그때서야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다. 현실에 죽어가는 빈 껍데기가 아닌, 사유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내일 떠오를 태양을 환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일도 글을 쓸 것이다. 폭풍우 사이로 들이치는 파도를 마주보며 살아가려고 한다. 입가에 느껴지는 삶의 짭짤함마저 사랑하고자 한다.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찬란한 물방울을 만끽하며, 송이와의 여행도 그렇게 기록하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 D+14 ‘도둑’ 고양이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