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은 무엇일까
사실 결심이라는 것은 둥둥 떠다니는 사념 중 하나였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의 최선도 아닐, 어쩌면 방금 걸으며 지나가다 본 상가의 간판 이름에서 우연한 연관성의 법칙을 발견했을 수도 있을 어떤, 그저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을 뿐인 어떤 것이 사유하기에 즐거워서 한번 더 선택지에 두어봤을 법한 판단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결심이라고 할 때 느껴지는 어떤 결연한 의지와 두터운 지지기반은 결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분위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심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원하는 걸까.
그것은 말하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관련이 있다. 궁지에 몰려 결심이라는 문자가 주는 견고함을 방패로 삼아 그 안에 숨는 경우. 결심이라는 것이 주는 이미지를 빌려 태도에 상관관계에 대해 표면적으로 다를 수는 있어도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엄숙한 분위기로 결심을 말하는 것과 습관적으로 결심을 남발하는 사람 모두 결심이란 것을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결심을 말하는 그 사람은 왜 그 결심을, 그러니까 그저 스쳐 지나가던 사념 중 하나였을지도 모를 어떤 생각 중 하나와 차별 없을 그것을 두꺼운 얼굴을 하고 누군가에게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불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대답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 대답이 정답이고 지금 상황에 필요한 적답이고 누구도 받아들일만한 현답이고 누구도 피해받지 않을 선답이라면 결심이란건 필요가 없다. 머리 안의 생각을 입술과 혀로 소리로 옮기기 전에도 부담이 없다. 생산되는대로 벨트에 올리고 넘겨도 누구도 불편하지 않다. 대답을 하는 동안에 쾌락까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해야만 하는 대답이 정답도 적답도 현답도 선답도 아니고 심지어 파악도 하지 못한 상황에 대답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결심밖에 없는 것이다.
‘샤워를 하지 않을 것이다’와 ‘샤워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샤워를 하지 않겠다는 표현의 정도와 깊이에 있어서 어떠한 산술적 차이도 없지만 청자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청자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다. 눈 앞에 빨간 천을 흔들고 있기 때문에 흔드는 것은 투우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소라 할지라도 일단 빨간 천을 향하는 것이다. 왜? 라는 질문 밖에 남지 않을 상황에서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도출해냈을지에 대해 과정을 설명할 기회를 얻는 것. 왜에 대한 대답을 한다 하더라도 질문자를 만족해줄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을 말하는 것도 불편한 상황에서 선택하는 감정적 호소. 사유의 결과의 시시비비를 가려주길 바라기보다 사유의 과정을 같이 훑어주기를 청하는 것.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을 했다. 결심을 말하는 사람들은 ‘나는 결심했다. 그러므로 나는 고민했었다.’ 라고 애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