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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영수 Oct 04. 2023

삶과 죽음에 대한

외할머니의 장례

거창하게 삶과 죽음을 논하기보단 일 순간 하나의 떠오름.


삶이라는 단어도 신기하다. 왜인지 ‘살다 감’을 줄여서 삶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저번주 수요일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몇 년 아프셨고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치매에 걸리셔서 가족들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외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손님을 맞고 장례식 비용을 지불하고 화장을 하고 화장이 끝난 후에 나무상자에 담긴 재를 건네 받고 혼백이라고 적힌 상자를 영정사진이랑 같이 들고 차 조수석에 앉아 할머니가 사셨던 거창으로 이동을 하고 했던 모든 것들이 뭔가 너무나도 체계적이고 순탄하여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졌다.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 재로 남았다. 재도 뿌려진다. 강이나 바다나 들에, 결국 남는 것은 없다. 여기서부터 의문이 들었다.


  사는 건 뭘까? 살다가 가는 것은 뭘까?  산다는 것은 그리 큰 축복도 아니며 거창하고 좋은 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것이면 어떡할까. 그렇게 아등바등 살던 그 어떻게 살던 내가 삶을 멈추는 순간, 나는 어차피 재고 말테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가 허무주의로 귀결되고 싶진 않다. 슬프다기보단 서글프다. 산다는 건 어쩌면 그저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 의해 잠깐 다녀가는 어떤 작은 들여다 봄은 아닐까.


<당신, 거기있어줄래요> 에서 ‘삶이란 우리가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이란 대사가 나온다. 여기서 방점을 찍을 곳은 우리가 잠들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잠들지 ’않‘는 시간이 아닌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이 삶이라면, 인간의 본성은 잠드는 것에 있다.  사람은 지속될 온전한 잠(죽음)을 맞이하지 못해 잠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삶은 온전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라면. 사실 인간은 잠들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태어나며 시작되는 죽음을 향한 멈출 수 없는 드라이브를 억제한 사람을 아직 보진 못했다. 잠을 계속 자려해도 언젠가는 눈이 떠지기 마련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알 길이 없다. 외할머니가 들여다 본 세상이 평온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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