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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영수 Oct 04. 2023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평이라기엔 모자란 후기

영화를 즐기는 입장에서 영화 속 인물과 관객(나)의 동기화는 중요하다. 애초에 등장인물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면 동기화 작업은 간편하다. 저거 나 아냐? 나도 저랬거나 저럴 것 같은데 생각이 드는 순간 저 인물이 겪는 사건 혹은 고통은 간접체험을 넘어 여러 경우의 수 중 나의 미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악인의 경우엔 어떨까. 나와는 다른 인물, 다를 거라고 믿고 싶은 인물의 경우에도 동기화 작업은 은밀하게 진행된다.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가 멀지 않으면 스크린과 관객의 거리도 그렇다. 카메라에 끌려다니며 인질이된 관객은 스톡홀름신드롬을 호소하며 인물의 고뇌와 고민을 공감한다. 크레딧이 올라가며 풀려난 그 자리엔 카타르시스가 있을테니까.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은 왜 죽었을까? 다니엘은 심장마비로 죽은게 아니다. 질병수당 항고일에 심사관 앞에서 멋진 연설을 하고 당당히 영국의 구멍난 복지제도에 정면으로 부딪혀 승리를 얻어낸 인물로 웃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다니엘을 죽인 건 심장마비도 영국의 복지제도의 행정도 아니다. 살해당했다. 범인은 켄 로치 감독이고 흉기는 영화, 동기는 카타르시스 제거다.


다니엘이 질병청 벽면에 락카로 메시지를 쓰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가 아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으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인칭이 변화되며 그 일은 다니엘 뿐만이 아니라 건너편에서 환호하는 군중에게도 번진다. 이제 스크린 밖의 관객은 그 군중의 위치에 가 있는 것이다. 마법같은 순간이다. 관객은 이제 건너편 군중이 된다. 동기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경찰이 다니엘을 연행하고 군중은 흩어진다. 여기서 켄 로치 감독은 다니엘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훈방조치된 다니엘은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질병심사 항고 자리에 선다. 다니엘은 준비한 연설문을 읽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죽는다. 심사관 앞에서 연설문 낭독 후 승리를 했다면 관객은 어떻게 될까.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영웅 다니엘의 성취감에 관객은 환호하던 군중처럼 일순간 도취된 후 흩어졌을 것이다. 극장을 나서며 미소를 짓고 저녁메뉴를 고민할테니까.  이 영화는 관객을 그 위치에 두지 않는다. 카타르시스는 정화이자 해소다. 다니엘이 죽어도 영화는 진행된다. 아무것도 해소된 것은 없다. 카타르시스가 파괴된 자리엔 이제 관객의 사유가 남는다. 해소해줄 수 없는 것을 해소해주는 척하는 영화는 범죄다.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춘 감독의 시선에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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