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앞마당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해마다 봄이면 새잎이 난다. 그 잎은 다른 식물의 잎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연두색이다. 나는 감나무 잎도 좋아하지만 홍시를 좋아한다. 감나무잎은 기름을 발라 문지른 듯 윤이 나고 매끄럽다. 감잎이 울창할 때 감나무 밑에 있으면 모자를 쓴 듯 햍빛을 가려주기도 한다. 감꽃이 피고 며칠이 지나면 감꽃이 떨어진다. 떨어진 감꽃을 줍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면 마당에 감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하얗게 떨어진 감꽃을 바구니에 주워 담을 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감꽃이 떨어지고 나면 그 자리에 어린 감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얼굴을 내민다. 어린 감은 점점 자라 가을이면 많이 굵어져서 보기만 해도 먹고 싶을 정도로 크고 주황빛의 예쁜 색깔을 띤다. 어쩌다 만지면 단단하며 속이 꽉 찬 느낌이 좋았지만 땡감이라서 먹을 수는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얼기 전에 땡감을 따서 잘 보관하면 홍시가 되어 겨울에 간식으로 먹는다. 홍시가 되는 과정에서 수시로 손가락으로 눌러 확인해 보며, 재촉해 보았지만 때가되야 홍시 되어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감이 익어서 때가 되야 홍시 되어 기쁨을 주듯 사람도 나이 먹다 때가 되면 잘 익은 홍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홍시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행복해야 한다. 사람도 발달 단계에 따른 변화를 잘 수용하고 관리하다 보면 어느덧 점점 잘 익은 홍시처럼 된다. 긍정적인 선택을 할 때 자신도 행복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 이제는 바쁜 일상을 떠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전에 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을 위해 하지 못했던 공부, 운동, 악기, 미술, 인문학, 글쓰기 등등 마음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욕구의 소리에 귀 기울여서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융은 “인생의 전반기에 빛을 쫓았다면 후반기에는 마음속 그림자를 보듬어라”고한다. 그동안 애써 감추려고 했던 마음속 그림자를 마주 보고 수용하며 수고한 자신을 다독이고 격려하며 살아야 한다. 인생은 젊을 때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홍시 같은 매력의 맛이 있다. 그 맛을 느끼며 즐기며 살아야 한다. 그 맛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을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다.
윌리암 글레써(William Glasser)는 인간을 자신의 행동과 정서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실존적 존재로 보았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욕구와 스스로 성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성취의 욕구, 사랑과 소속의 욕구, 힘의 욕구, 자유의 욕구, 즐거움의 욕구, 생존의 욕구다. 젊었을 때는 생존을 위해 성공을 위해 인정받기 위해서 업적을 내고 열심히 살았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긍정적인 선택을 하며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상담장면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많은 성인 중 자신의 욕구를 그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을 때 그런 바람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대부분의 사람은 어릴 때 양육자로부터 수용 받지 못했거나 방치되었거나 사랑받지 못한 결핍이 성인이 되어서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그 누군가가 다가와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좌절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즉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은 못 하고, 힘든 감정을 마음속에 가둬두고 수동 의존적이며,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마음이 힘든 사람 중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덮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왔는데 상담장면에서 자신을 봐야 할 때 많이 힘들어한다. 심지어는 다음 상담에 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상처가 건드려 지면 아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상처만 드러내 놓고 달아나는 내담자를 보면 안타깝다. 그 상처가 지금의 문제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회복이 빠르다. 오랫동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부정적인 감정을 덮어놓고 살았는데 그 감정들이 건드려 지면서 오히려 수치심과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내면에 힘이 없으면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더 덮어두거나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보기 싫은 과거의 아픔을 마주하고 수용할 때 마음이 편안해질 뿐 아니라 회복이 된다.
나도 나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역할에만 충실하며 살았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나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 안에 살기보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감정을 더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나 인생 후반전은 너무 역할에 치중하기보다 구원받은 자로서 은혜 안에서 나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해야겠다. 상대방이 나의 욕구를 채워주길 기대하기보다 나의 욕구를 내가 알아차리고 채워주도록 노력해야겠다.
인생의 오후가 되어서야 내 욕구는 내가 알아차린 후 내가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현실치료의 선택이론을 통해서 깨달았다. 선택이론에서는 내가 지각하는 현실 세계를 원하는 좋은 세계로 만들어가는 것은 나의 선택이라고 하였다. 상대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세계를 내가 선택하라고 한다. 선택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꿀 때 행동과 감정과 신체 반응까지 달라진다고 한다. 상대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세계를 위해서 내가 긍정적인 선택을 할 때 행복하다고 하였다. 인생 후반전은 내가 원하는 세계를 위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