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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Oct 07. 2023

헨리8세와 전쟁 없는 종교개혁

헨리8세와 이상한 종교개혁     

  헨리8세는 ‘천일의 앤’이란 영화에서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한 후, 그 여인도 사랑이 식자 이내 사형에 처한 비정한 왕이다. 여성편력이 심해서 우리 조선의 숙종과 장희빈이 연상된다. 6명의 왕비를 뒀고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사랑했지만, 헨리8세를 여성편력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첫 번째 왕비와의 이혼, 두 번째 왕비의 처형은 왕자를 낳지 못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헨리8세는 아들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확실한 후계자가 있어야 왕권이 안정되고 레임덕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 같다. 백년 전쟁후 프랑스는 왕권이 강화되어 유럽의 최강자가 된 반면, 영국은 전쟁에 패배한 탓인지 30년간 왕위계승전쟁(장미전쟁)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피폐해져서 유럽의 변방이 되고 말았다. 왕권의 안정이 부국강병의 초석이었다. 헨리8세 입장에서는 아들 없이 자신이 죽으면 다시 아버지 때와 같은 혼란이 생길 것 같았다.      

  헨리7세의 정통성 부족과 경제발전 

  아버지 헨리7세는 핏줄의 정통성이 약했다. 왕가와의 연줄은 어머니가 에드워드3세의 고손녀라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랭커스터 가문의 남자들이 전멸하다시피해서 헨리7세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었다. 요크 가문인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하여 정통성을 보강하였으나, 그래도 치세 내내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헨리 네가 왕이 될 수 있다면 내가 못될 이유도 없지 않느냐” 며 장삼이사들이 모두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가짜들이 참칭자로 나서기도 했다. 반란 때문에 헨리8세도 5살 때 런던탑으로 피난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 헨리 7세는 자신의 정통성 부족을 경제 발전으로 메우려 했다. 박정희·전두환 전대통령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경제 건설을 내세운 것처럼…. 수출을 장려하고 국내산업을 보호하며 국가가 상선을 건조하여 대여하는 등 상공업을 진작시켰다. 포도주 수입을 잉글랜드 선박에 한정하는 항해조례시행 등 제도개편도 단행했다. 해상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상선에 대포를 장착하고 해군을 육성했다. 그 결과 상인들의 지지를 얻어 세금을 수월하게 걷었고 튼튼한 재정을 남길 수 있었다.     

  헨리8세의 국제무대 위상강화

  반면에 아들인 헨리8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가진 군주처럼 보였다. 우선 랭커스터 가문의 부친과 요오크가의 어머니 혈통을 물려받아 정통성 시비가 없었다. 또한 아버지 헨리7세덕에 국고도 든든했다. 그 돈을 제대로 쓸 곳을 찾아야했다. 우선 선왕이 추진해온 해군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해 즉위 5년 만에 해군의 규모를 헨리7세 때보다 4배나 증강시켰다<나무위키>. 

  이제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고 싶었다. 헨리 8세는 북이탈리아에서 교황에 맞서고 있는 프랑스에게 "모든 기독교인의 아버지이며, 신성하신 그 분에게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고 경고하며<나무위키> 전쟁에 뛰어들었다.

  프랑스의 동맹인 스콧틀랜드가 영국을 배후에서 공격하자 플로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왕(제임스 4세)을 죽이고, 수도 에든버러까지 점령하는 대승을 거뒀다(1513년). 스코틀랜드를 굴복시키고 웨일즈를 통합하며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여 잉글랜드가 다시 열강의 위치에 올라서게 했다.     

   이혼과 로마와의 결별

  그러나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생기지 않았다. 캐서린과는 금슬이 좋았지만 17년의 결혼기간동안 3남3녀를 태어나자마자 잃었고 딸인 메리만 살아남았다. 헨리 8세는 남자 후계자가 없으면 자신의 사후에 튜더 왕가가 무너지지 않을까 두려웠고, 왕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은 형수와 결혼한데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믿었다. 그 때 앤 불린이 등장했다. 미인이었고 매력도 있어 헨리가 좋아했으나 앤불린은 정식왕비가 되기를 원했다. 정통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자신과 정식으로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왕의 이혼에는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 로마 교황은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 5세 황제의 인질이나 다름없어 이혼을 승인해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어 로마 교황청의 특사를 보내서 영국서 이혼 재판을 하도록 했다. 캐서린은 평소 고분고분했지만 자신이 이혼하면 딸 메리가 공주의 신분을 잃게 되므로 예상외로 강력하게 저항했고, 재판은 6년이나 끌었다. 

  교황이 이혼을 승인하지 않자 헨리8세는 독자노선을 강행했다. 1533년 5월 잉글랜드 법원은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을 무효화했고 6월에 앤은 왕비가 되었다. 조강지처를 몰아내고 왕비가 되다보니 앤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를 낳고나서 계속 유산을 했다. 1536년 1월 캐서린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 앤은 아들을 사산했다<엘리슨 위어, 엘리자베스1세 P26>. 사람들은 천벌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캐서린 왕비처럼 친정의 빽도 없었고 대중의 사랑도 받지 못한 앤 불린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이내 헨리8세의 총애를 잃었다. 그리고 왕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앤불린을 처형했다. 든든한 후계자를 얻어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책임감 때문인지 몰라도 헨리8세는 참으로 비정했다. 앤불린이 죽은지 10일만에 헨리8세는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여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얻었다.      

  영국교회의 분리

  다만 이혼과정에서 종교개혁이란 부산물을 낳았다. 헨리8세는 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영국 법원의 이혼 승인을 득한 김에 1534년 의회에서 <수장령>을 통과시켜 아예 영국 교회를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 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헨리8세의 조치는 의회의 승인과 백성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 이유는 당시 영국사람들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황의 세속적 사치를 위해 영국의 재산이 사용되고 있다는데 분개하고 있었고, 둘째 이단으로 탄압받았지만 영국에는 100여년전 로마교황청의 타락을 비판했던 종교개혁자 위클리프의 영향이 남아있었다. 그의 추종자인 롤러드파가 로마와의 결별을 열렬히 지지했다. 셋째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이 영어 성경과 함께 영국에 소개되고 있어 로마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E.M.번즈, 서양문명의 역사Ⅱ>.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등용과 신교출신의 활동

  교회분리는 헨리8세의 신분에 구애받지 않은 과감한 인재발탁이 큰 힘이 되었다. 당대의 실세인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푸주한 아들, 토머스 크롬웰 재상은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 이들은 권력의 원천이 왕의 신임밖에 없어 왕에게 충성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기득권 세력인 카톨릭에 비판적이었고 신교성향이 강했다.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도 자신의 적인 캐서린이 보수적인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던 상황이라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신교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기용했다. 헨리8세의 이혼무효 선언과 이후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켄트베리 대주교인 크랜머는 앤불린 집안의 예배당 사제였다.        

  묘한 종교개혁과 딸의 역할 

  하지만 헨리8세는 카톨릭의 교리를 바꾸지 않으려했다. 수장령은 잉글랜드의 왕과 법원이 교회의 자산 운용을 감찰할 권리와 성직자에 대한 형사 재판 권한을 선언한 것으로<나무위키>,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관할권을 벗어나서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헨리 8세는 정치인이었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행동했다. 초기에는 교황편을 들어,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공격했고 레오10세로 부터 ‘신앙의 수호자’ 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이혼문제로 교황청과 결별했으나 교리까지 건드려 종교 갈등이 불거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저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영국교회 재산이 로마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탁한 주변 사람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서서히 추진되고 있었다. 토마스 크랜머 등은 헨리8세 시절에 교리문제를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평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영어성경을 교회에 비치하게 했다. 그들은 헨리8세 사후 에드워드 6세 시기에 기도서 등 신교의 교리도 개편해 갔다. 

  영국은 위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주변국들과 비교해서 피를 덜 흘리고 개혁을 한 느낌이다.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으로, 독일에는 농민전쟁과 카를5세와 제후들간 전쟁이 일어났으나, 영국에서는 일반백성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헨리8세가 광기를 부려 첫 왕비와 무리하게 이혼하고 두 번째 왕비를 처형하기는 했지만…. 왕은 카톨릭 신앙을 고집했지만, 로마와 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기용한 신교성향의 사람들이 개혁을 추진해갔다. 왕이 아니라 실무관료들이 전쟁 없이 이루어낸 것이었다. 참으로 신의 뜻은 알기 어렵다. 헨리8세는 아들을 얻으려다 영국교회를 분리해내는 데까지 가게 되었다. 로마 교황과 분리되고 영국교회의 수장이 왕으로 바뀌었는데 어떻게 과거와 같은 교리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신교사상이 채워졌다. 

  헨리8세는 아들을 낳아야만 튜더왕가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어긋나게 아들인 에드워드6세는 재위 6년 만에 16세의 나이로 죽었고, 결국 딸들이, 즉 메리1세와 엘리자베스1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영국의 황금시대를 열어 대영제국의 초석을 마련하고 튜더왕가를 영원히 기억하게 한 것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 딸인 엘리자베스1세였다. 헨리8세는 과도하게 아들만 고집하다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개혁을 하려는 신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는지 모른다.      

  통계 조작과 공무원의 자세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 가격, 소득·분배·고용 등 정부통계를 조작한 사실이 감사원에 의해 밝혀졌다. 지난 정부 5년간 서울 집값 상승률을 국토부 산하 부동산원은 19.5%로 집계했는데, 민간(KB부동산)이 조사해 발표한 수치는 62.2%였다. 또 가계소득이 줄어들었는데도, 더 늘어난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해서 소득주도성장정책을 옹호했다. 통계조작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고 모든 정책을 겉돌게 한다. 통계는 정책을 어떻게 운용할 지 판단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지난 정부의 통계조작은 나라 상황을 오판하게 해서 집값 앙등, 소득·고용 참사 등 정책재앙을 초래했다. 통계조작은 범죄다. 관련자들을 엄벌함과 동시에 통계 공무원들이 높은 직업윤리를 가질 수 있도록 상벌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국제적인 통계 기준의 준수 여부를 정기적으로 검사하고 공개하는 시스템도 만들었으면 한다. 영국의 종교개혁을 왕이 아닌 그를 도운 관료들이 차근차근 추진해갔듯이 국가 기관의 관료들은 정치에 휘둘리지 말고 꿋꿋이 법과 원칙에 맞게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공무원들에게 신분보장과 연금을 보장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위한 안전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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