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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Nov 23. 2023

카를5세를 만든 여인들

어머니, 고모, 그리고 아내

카를5세를 만든 여인들     

  괴테는 “그 시대의 여성을 모르면 그 시대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세상은 남자가 주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를 움직이는 것은 커튼 뒤의 여자인 것 같다. 어머니가 없으면 황제도 있을 수 없다. 카를 5세도 그를 음으로 양으로 도운 여인들의 힘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룩한 것 같다.      

1. 어머니 광녀 후아나

  프랑스는 100년 전쟁후 왕권과 중앙집권이 강화되었고, 자연스레 유럽의 강자로 떠올랐다. 이에 주변국들은 불안해졌다.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점령 이후 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가문이 앞장을 섰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세력을 몰아낸 스페인과 결혼동맹을 맺었다. 합스부르크의 필립 왕자와 스페인의 공주인 후아나가 결혼하게 되었고(1496년), 합스부르크왕가의 마르가레테 공주도 후아나의 오빠이자 스페인의 왕세자였던 후안과 결혼했다(1497년).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애초에 후아나는 왕위계승 서열상 3번째였지만, 오빠 후안이 결혼 후 6개월 만에 사망하고, 후아나의 언니이자 포르투갈의 왕비인 이사벨 또한 사망하여 이후 통합 스페인 왕국의 왕위는 후아나 공주(일명 광녀 후아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 여인이 카를 5세의 어머니이다.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이 죽자 정신이상 현상을 보였고 그 이유로 아버지 아라곤의 페르난도에 의해 유폐된다. 그러나 정신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 않다. 스페인 왕권을 두고 남편과 아버지가 싸우고 있었고 자신들이 왕권을 차지하려고 후아나의 정신이상 문제를 떠벌리고 있었다. 조울증은 있었지만 그것을 과장해서 소문냈을 것이다<Wikipedia, Joanna of Castile>. 1506년 남편이 공동왕이 되었으나 임명후 2개월 만에 죽게 된다.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하나 독살이라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장인인 페르난도 2세와 공동왕이 되는 권리를 두고 많이 다퉜기 때문이다. 후아나는 남편을 매장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라나다의 가족묘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 전달되어 후아나가 남편의 관을 끌고 스페인을 돌아다닌다는 루머로 번졌다. 정신이상으로 증폭된 것이다. 어쨌든 1년 후에 아버지 페르난도2세가 후아나를 토르다시르 성으로 유인해서 유폐시켜 버렸다. 어머니 이사벨라여왕의 유언장에 “후아나에게 문제가 생기면 후아나의 첫째 아들 카를이 성인이 될 때까지 페르난도가 섭정을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서 자신이 섭정이 된 것이다. 권력 앞에서는 모자간의 정도 없어 보인다. 물론 당시 후아나로서는 여러 가지 상황이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역병과 가뭄이 번져 왕국 인구의 반이 쓰러질 정도로 사정이 나빴고 민심도 이반되고 있었다<Wikipedia, Joanna of Castile>.

  후아나는 카를 5세 초기 코뮤네로스 반란이 났을 때 반란군들의 지지요청에도 이를 슬기롭게 거절하며 아들의 권리를 지키는 정치적 결정을 했다. 만약 이때 후아나가 반란군을 지지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정신적으로 혼미한 상황에서도 모성본능이 발휘된 걸까. 아니면 미쳤다는 주장이 과장된 것이었을까.     

  신이 왜 이런 얄궂은 운명을 이 여인에게 주었는지…. 참으로 후아나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다. 원래는 왕위계승권자가 아니었지만 오빠와 언니의 죽음으로 왕위를 이어받았고, 유럽 최고의 미남과 결혼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남편은 일찍 죽었고,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들어갈 수 없었듯이 후아나는 정신장애로 직접 통치할 수 없었다. 그 후 장성한 자녀들의 성공을 함께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오래 살았지만 평생을 유폐되어 서류상으로만 스페인의 통치자였다. 유폐되어 정보와 소통이 없다보니 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었는지 모른다.  

 신은 후아나에게는 가혹했으나 그녀의 자손들은 번성하게 해주었다. 후아나의 첫째 아들은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이룩했고 둘째 아들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이어감으로써 유럽 최고의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건설했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의 딸들은 유럽 각국의 왕비가 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씁쓰레한 것은 성공한 아들인 카를 5세가 비정했다는 것이다. 스페인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머니를 찾았을 때는 온갖 아양을 떨다가, 자기가 원한 것을 얻고 나서는 어머니를 유폐에서 풀어주지 않았다. 자신의 왕권이 침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첫 번째 방문 이후로 다시는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불효자였다.      

2. 고모 마르가레테     

  고모 마르가레테는 남편 복이 지지리도 없었다. 처음에 프랑스의 왕세자 샤를 8세와 약혼하였고 프랑스 왕궁에서 키워졌다. 그런데 샤를 8세가 부르고뉴의 영토를 프랑스에 합병하기 위해 부르고뉴의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플랑드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다. 정략결혼은 피도 눈물도 없었고 국가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후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막사밀리언 1세의 결혼정책으로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였던 후안과 결혼했다. 하지만 후안은 결혼 후 6개월만에 사망했고 마르가레테는 임신한 여자아이를 사산했다. 다시 사보이아 공작과 재혼해서 행복한 시절을 보낸 것 같다. 남편은 사냥에 열중하고 마르가레테가 외교정책 등 나라운영에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역시 결혼한 지 3년 만에 사망하였다. 우리나라였으면 ‘남편 잡아먹은 년’으로 비난받았을 것이다. 이때 마르가레테도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질긴 목숨이라 풀섶에 떨어져 죽지 않았다. 남편과의 가정생활이 그리웠던지, 아니면 자신의 팔자가 기구함을 알았는지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죽은 남편을 추모하며 사보이 공국에 머물려 했다. 사실 남편인 사보이 공작은 사냥에만 관심이 있고 국정을 소홀히 했는데, 그 틈을 타서 서출 동생 르네가 모든 국가 사무를 통괄하는 실세가 되어 있었다. 마르가레테는 르네를 쫓아내고 남편의 권리를 되찾아 사보이 국정을 장악하기도 했다. 마르가레테는 겉은 여자였지만 속은 남자였다. 그래서 여자로서, 아내로서의 삶이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프랑스 왕비는 돈에 밀려, 스페인의 왕비도 남편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후 사보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신은 앗아가 버렸다. 자기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나 싶었을 것이다. 어떻게 자신에게 결혼의 행복을 주지 않느냐고 신에게 원망하지 않았을까. 그 후 아버지 막시밀리언 1세가 영국의 나이 많은 헨리 7세와의 결혼을 주선하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헨리7세가 곧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플랑드르에 돌아와서 오빠와 후아나가 낳은 조카들, 즉 엘레오노라, 카를, 이사벨라, 마리를 마르가레테가 맡아 키우게 되었다. 후아나는 조울증이 있어 직접 아이들을 보살필 수 없었다. 1506년 오빠 필리프가 스페인에서 죽자, 사실상 고아가 된 이들의 어머니 역할을 마르가레테가 하게 되었다. 신은 이들을 키우는 배역을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특히 마르가레테는 카를5세의 대모이기도 해서 그의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여자아이들은 자라서 각국의 왕비가 되었고 카를은 성장해서 ‘해가 지지않는 제국’의 주인이 되었다. 마르가레테는 카를이 어릴 때에는 그를 대신해서 플랑드르의 섭정이 되었고(1506년), 그가 커서 황제가 되었을 때는 종신 플랑드르 총독이 되었다. 마르가레테는 조카를 잘 키운 덕에 사실상 한나라의 군주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푸거가로부터 100만 굴덴을 빌려서 투표권이 있는 선제후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프랑수와 1세도 뇌물을 줬지만 30만 굴덴을 사용했다고 한다. 마르가레테의 통 큰 결정이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뛰어난 정치적 판단으로 교황과 프랑스가 협력한 코냑 동맹의 공격을 막아내고,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수와1세의 어머니 루이제를 만나서 평화협정을 논의했다. 1529년 협정이 체결되었고 당분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아마 그녀의 최대 업적일 것이다. 또한 그녀는 경제에도 감각이 뛰어나서 영국과의 모직물 교역을 진흥시켜 경제를 활성화했다. 플랑드르를 제국의 돈주머니로 만들어 조카의 전쟁경비를 지원했고<encyclopedia>,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다. 지금도 세워져 있는 그녀의 동상이 증명하듯이 그녀는 훌륭한 통치자였다.          

3. 부인 이사벨라     

  카를5세는 아내 복이 많았다. 카를 5세는 원래 영국과의 동맹을 위해 헨리8세와 이모 캐서린 사이의 딸인 메리와 결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카를 5세가 20살이 넘어가자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제국의 후계자도 낳아야 했다. 당시 카를은 프랑스와의 파비아전투에서 승리해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떠오르며 뽐내고 있던 상태였다. 여기저기 구혼이 쇄도 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포르투갈의 공주이자 4촌인 이사벨라와 결혼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았을 것이다.    

  1526년 카를5세와 이사벨라 공주는 만난 날 밤에 결혼을 했다. 옛날 유럽왕가에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끼리 결혼해야했다. 결혼이 정치적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배우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 하며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사진도 없고 분식된 초상화에 의존해야했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카를은 첫눈에 이사벨라에 푹 빠졌다고 한다. 그녀는 미인이면서도 재치있어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와서 카를5세의 이탈리아 전쟁 등 경비를 갚을 수 있게 해줬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고 의지했다는 것이다. 이사벨라는 스페인을 자주 비운 남편을 위해 섭정을 했고 훌륭한 정치적 판단으로 스페인을 잘 다스렸다. 카를이 초창기에 반란을 겪었던 곳이라 자리를 비우면서도 항상 걱정하던 곳이었다. 그녀는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라 스페인 백성들의 호감도 얻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서른다섯 살이란 젊은 나이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1539년). 카를 5세는 정무를 그만두고 거의 두 달 가까이 기도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었다. 그 후 평생 그녀를 애도하며 검은 옷을 입었다. 

  대단히 센티멘탈한 황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서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정략결혼의 시대였기 때문에 결혼은 유용한 정치적 도구였고 왕자가 1명뿐이어서,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다시 결혼해서 아들을 더 낳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도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내를 항상 그리워하며 아내의 초상화를 전쟁터나 출장 갈 때나 남은 생애동안 항상 소장하고 다녔다. 은퇴하며 유스테 수도원에 들어갈 때도 그 초상화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또한 아들 펠리페2세는 어머니 이사벨라의 핏줄 덕에 포르투갈 왕국을 통합했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다.     

  신은 후아나에게는 카를 5세 등 훌륭한 자녀들을 낳는 역할을, 마르가레테에게는 후아나가 낳은 아이들을 키우고, 조카를 위한 플랑드르 대리통치 배역을 준 것 같다. 이사벨라는 스페인의 안정된 통치와 남편의 정신적 안정에 도움을 준 것 같다. 카를5세는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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