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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Dec 05. 2023

형과 동생

카를5세와 동생 페르디난트 1세

   

   덕의 실천자 페르디난트 1     

  1503년 한 사내아이가 스페인 왕가에서 태어났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낸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이 아이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였다. 그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외손자였다. 이사벨 여왕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6년 전에 죽어 버려, 왕가를 이어갈 남자라고는 외손자밖에 없었다. 외손자가 한 명 더 있었으나 유아 사망율이 높았던 때였고 멀리 플랑드르의 친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이 아이는 스페인에서 자기들이 직접 보고 키울 수 있는 아기였다. 게다가 당시 이사벨라 여왕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 아이의 출생 후 1년 후에 죽게 된다. 죽기 직전에 자신을 이어갈 후손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사랑 속에 자란 아이

  어머니 후아나는 원래 왕위계승 서열이 3번째였으나 오빠와 언니가 죽어버려 스페인왕가의 정식 왕위계승권자가 되어있었다. 따라서 이 아이도 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페르난도 2세의 생일날에 태어나서, 외할아버지와 같이 ‘페르난도’라고 이름지었다. 독일어로는 페르딘난트로 발음된다. 외할아버지의 기쁨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이사벨라 여왕은 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보살피는 24명의 하인 중에 음악가를 4명이나 배치하기도 했다<Wikipedia>. 당시에도 아이들 교육에 음악이 좋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공자님도 음악으로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플라톤도 도덕성 함양의 수단으로 음악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하였으니…. 페르디난트는 왕이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과 화합하고 협조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어릴 적 음악의 영향인지 모른다. 

 어머니가 정신이상으로 유폐되자, 페르디난트는 외할아버지의 아라곤 궁전에서 자라게 되었다. 기억력이 좋고 총명하며 호기심이 많아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형에 밀린 왕위 계승 

  페르난도 2세는 노쇠해져 죽음이 다가오자, 자신이 직접 공들여 키운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하고 싶었다. 스페인 귀족들도 스페인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언 1세는 형인 카를을 내세웠다. 

  카를이 형이었고 이사벨라 여왕의 유언장에 카를이 후계자로 되어있으며 플랑드르에서 자란 카를과 친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디난트에 대해서는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호흡을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카를의 가정교사인 아드리안 주교를 보내 사돈(페르난도2세)을 설득했다.  

  페르난도 2세는 직접 통치하는 아라곤의 왕위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으나, 카스티야가 카를을 왕으로 선택하면 자신과 이사벨라 여왕이 애써 이룩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통합을 스스로 허물게 되는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막스밀리언 황제의 뜻에 따라 카를을 스페인의 후계자로 하는데 동의했다. 페르디난트에게는 미안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페르디난트에게 상응하는 보상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형 카를은 스페인에 도착해서 어머니의 승낙과 카스티야 의회의 동의를 얻는 등 왕위계승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동생을 불편해하자, 할아버지 막시밀리언 황제는 페르디난트를 고모 마르가레테가 있는 플랑드르의 메헬렌 궁전으로 옮기도록 했다.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형 카를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독일로 갔을 때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은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독일도 스페인처럼 권력공백으로 인한 반란이 일어날까봐 불안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종교대립, 제후들의 반발 등으로 골치만 아픈 명예만 높고 실속은 없는 ‘빛 좋은 개살구’란 사실을 깨달았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풍요로운 지역도 혼자 통치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이 골치 아픈 지역을 대신 통치해 줄 믿을 수 있는 대리인이 필요했다. 적임자로 페르디난트가 떠올랐고, 아무 직위 없이 그를 놀려두면 스페인 사람들이 반란지도자로 옹립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페르디난트를 풍요로운 스페인과 영원히 떼어 놓는 결정이 곧 내려졌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 대공의 작위(1521년)를 받고, 황제 대신 제국회의에 참석하는 권한도 위임받았다. 이후 30년간 이 조치에 따라 형을 대신해서 제국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사실상 독일 전체를 다스렸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통치권을 넘겨받자, 곧 비엔나로 부임했다(1521년). 하지만 여기도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독일어에 서툰 외국인 출신의 대공에 대하여 토착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1522년 7월 이를 진압하고 피의 숙청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내에서 루터파등 개신교의 확산과 농민 반란도 페르디난트를 힘들게 했다.     

  형의 신임을 얻다  

  이런 초창기의 어려움 때문인지 페르디난트는 평생 형에 충실했고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다. 스페인에서 자란 그가 독일이란 외딴곳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밖에 없었다. 사방이 적인 이곳에서 형의 신뢰를 잃는 순간 토착세력에 의해 한순간에 몰락할 수도 있었다. 단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때마침 형의 신뢰를 얻을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프랑스와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 참여한 황제군의 반 이상이 란츠크네이터 용병 등 독일병사들이었고, 이들의 분전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독일군의 동원은 페르디난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전투 이후 카를 5세의 동생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그를 독일왕으로 하여 자신의 후계로 하겠다는 공약까지 했다<British encyclopedia>.    

  페르디난트는 ‘어릴 때 고생은 사서도 하라’는 말처럼 초반기의 고난을 겪으면서 화합과 덕치의 인물로 되어간 것 같다. 그는 처음에는 완전한 스페인 사람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독일어와 독일 문화를 습득하였고, 독일을 통치하면서도 황제의 대리라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독일 제후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헝가리 왕위 다툼

  그가 물려받은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이나 부르고뉴에 비해 척박하고 가난한 곳이었지만 영지가 늘어날 기회가 왔다. 헝가리왕 러요시 2세가 오스만 술탄 슐레이만1세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다(1526년). 러요시 2세는 페르디난트의 누이 마리아와 결혼했고 부인인 언너의 남동생이기도 했다. 처남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러요시 2세의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의 왕권을 페르디난트 자신이 계승해야했다. 아내 언너가 왕위계승 권리가 있었고 처남이 죽기 전에 페르디난트 자신을 후계자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동유럽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를 제외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페르디난트가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다만 헝가리 왕위 계승은 쉽지 않았다. 당시 헝가리 귀족들이 서포여이 야노시를 국왕 야노시 1세로 옹립함에 따라 페르디난트는 자기 아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를 공격했다. 1527년의 타르칼 전투에서 승리하여 야노시를 헝가리에서 몰아냈으나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1세의 개입으로 30여년 간의 전쟁에 들어갔다. 오스만 투르크는 강대한 국가였다. 세입이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 수입의 4배나 되었다고 한다<마틴 레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형인 카를이 도왔다고 해도 페르디난트에게는 힘겨운 전쟁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주로 방어에 치중 했지만 그것도 페르디난트에게는 버거웠다. 헝가리 영토의 70%를 빼앗기고 서부 헝가리만 확보했지만, 그의 분투는 헛되지 않았다. 서유럽을 지킬 수 있었고, 후손들이 나중에 헝가리 전체를 되찾는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2인자와 덕치

  페르디난트는 오랜 기간 참고 인내하며 마지막에 승리한 성공한 2인자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영토는 카를 5세의 자손이 아닌 페르디난트의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졌고 19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까지 이어졌다. 형인 카를의 자손이 유전병으로 일찍 단절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힘과 무력보다는 덕의 통치가 오래가는가 보다. 

  요즘 정치를 보면 전쟁 상황으로 보인다. 모두 힘으로 상대를 누르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일로 논쟁하는 덕의 정치를 보여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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