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제도 폐지 주장과 내부 전쟁
츠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용병제도
“돈을 벌기 위해서 죄 없는 나라를 약탈하고 황폐화시킨 행위를 당신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전쟁을 하면 안 되는 교황과 주교들의 돈을 받고 싸우겠습니까?”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인 츠빙글리의 외침이다(정미현, 용병제도를 통해 본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사회 경제적 배경). 그는 용병제도에 반대했다. 스위스는 가난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외국의 전쟁터 용병으로 팔려갔다. 때때로 스위스 젊은이들이 서로 다른 편에서 싸우는 비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츠빙글리는 직접 군목으로 참가해서 이러한 참상을 몸소 체험했다. 더욱이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되는 교황이 초래한 전쟁터에서 스위스 젊은이들이 용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교회의 위선과 모순을 느꼈다.
가난하고 척박한 땅인 스위스에서는 공동체의 협력과 단결이 절실했다. 그 결과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츠빙글리는 신앙과 공동체의 일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용병제도를 포함한 사회의 모순을 종교개혁과 함께 해결하고자했다.
교리보다 실천윤리를 더 강조한 인문주의자
그는 부유한 아버지 덕택에 비엔나 대학을 거쳐 바젤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는 등 당시 유럽의 지식인 그룹인 인문주의자가 되어 갔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도 인문주의자다운 합리적 사고를 했고, 에라스무스처럼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생각했다. 또한 성경교육을 통해 제도와 도덕을 개혁하려 했다<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 그 결과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루터와는 달리 교리보다 실천윤리를 더 강조했다.
소시지 사건을 계기로 개혁에 나서다
츠빙글리는 1522년 육식을 금지하는 사순절에 취리히의 인쇄업자가 주도하는 소시지를 먹는 사건에 가담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뛰어들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 전 40일을 말하며, 신도들이 참회와 경건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는 중세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었다. 도시 내 지도급 인사들의 일탈은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츠빙글리는 이에 대해 사순절에 육식을 금하는 전통은 성경에 근거가 없으며 하느님이 주신 음식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성경에서 사제의 결혼을 금한 바가 없으므로 사제들의 결혼을 요청하는 서한을 상급교회(콘스탄츠 교구)에 보내기도 했다. 츠빙글리도 사실상 결혼한 상태였고, 당시 많은 사제들이 숨겨둔 아내를 두고 있어 결혼 청원은 이를 양성화하는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1523년 취리히 토론회에서 성서의 권위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담은 67개 결의를 발표했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지원하는 새로운 축이 된 것이다.
그는 루터와 동년배였고 성경을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하는 종교개혁 운동을 비슷한 시기에 추진했다. 바로 옆에서 친구가 번개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고 루터가 개심을 했듯이, 츠빙글리도 흑사병에서 회복하는 극적인 신앙체험을 겪었다.
루터와의 차이, 성만찬과 성상숭배
그러나 각자 처한 사회적 상황이 달라서인지 루터는 개인차원의 신앙과 교리를 중시하고 영적세계와 세속의 일을 분리했지만, 츠빙글리는 용병제도 등 공공의 일을 종교개혁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성경을 보는 관점도 달랐다. 루터는 구원으로 이어지는 신의 약속이라고 믿었지만 츠빙글리는 윤리적 삶을 살아가라는 신의 명령이라고 봤고(알리스터 맥그라스 기독교의 역사 p362).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성찬식, 성상숭배 등에서도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츠빙글리가 성상숭배에 반대한 이유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 아닌 단순 미신에 불과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루터는 성상숭배가 일반신도들의 신앙심을 키울 수 있고 성경에서 명확하게 금하지 않았으므로 허용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성상숭배냐, 성상파괴냐’는 이미 동로마제국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온 주제였고 비잔틴 교회에서는 궁극적으로 성상숭배로 돌아섰다. 반면 이슬람은 성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느 것이 옳은 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츠빙글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는 카톨릭 의례는 모두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취리히 의회는 그의 의견에 따라 성상파괴에 앞장섰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였다. 미사 때 축성한 빵과 포도주를 루터는 성경에 적혀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여겼다. 한국 사람들이 제사 음식에 조상들의 숨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빵을 나누는 것은 생명을 주는 성서로운 행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빵을 내 살로, 포도주를 내 피라 하지 않았을까.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믿음의 문제라 생각된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이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찬식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자리에서 그분을 기념하는 것이며 그 분이 장차 다시 올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하늘에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육체가 어떻게 빵 속에 있을 수 있느냐”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츠빙글리는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루터와 별도로 자신의 신앙의견을 전달했다. 루터와 결별한 것이다. 그는 신앙인이라기보다는 논리성을 중시하는 지식인이었다. 성체와 관련해서는 8세기 이탈리아의 란치아노, 13세기 볼세나 등에서 성체를 의심하는 사제들을 일깨우기 위한 기적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남미 등에서 유사한 기적이 보고되고 있다. 사실 성만찬에 대해서는 9세기 때부터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설과 상징이라는 주장의 대립이 있었고, 외적 형태는 빵 그대로이되 그 실체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내용이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와 1274년 리용 공의회에서 카톨릭교회의 공식입장으로 결정되었다. 칼뱅은 성만찬에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해석했다. 개혁파가 분열될 만큼 중요한 신학적 교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적극적인 사회참여, 국가와 교회의 통일지향
그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자이기도 했다. 제1차 취리히 토론회에서 공개토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개혁을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그는 토론에 자신이 생겼는지 시민들과 함께 고민하고, 결론을 내는 토론회 방식을 선호했다. 기존의 권위와 싸우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의 공감과 연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성경해석상 이견이 있을 때에는 종전에 로마 교황청이 결정하던 것을 신앙공동체의 대표인 ‘시의회’가 결정하도록 했다. 취리히의 성공에서 힘을 얻어 다른 도시에도 이 방식을 권유했으며, 스위스와 독일 서남부의 도시들이 이를 따라하게 되었다(이동희, 종교개혁가들 p101). 츠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국가와 교회의 통일을 지향했던 것 같으며, 종교적 권위를 시민들이 뽑은 공동체 대표가 가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용병제도 반대와 패전
초창기에 츠빙글리는 여러 번 교회를 옮겨야 했는데, 사실상 쫓겨난 것이었다. 용병제도 반대가 화근이었다. 처음에 목회를 시작한 글라루스는 젊은이들의 용병수입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도시였다. 여기서 용병제도를 반대하니 주민들이 반발하게 되었고 다른 도시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트 교회로 옮겼는데, 취리히는 큰 도시로 다른 산업이 발달되어 있어 츠빙글리의 반용병 정책에 그렇게 비판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용병금지정책은 내지(內地) 스위스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대란을 의미했다. 내지 사람들은 "용병수입 없이 당장 어떻게 부족한 식량을 조달할 것이냐"며 반대를 제기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용병지지자와 반종교개혁을 동일시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베른 등 종교개혁을 지지하지만 용병을 포기할 수 없는 도시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카톨릭을 신봉하는 5개주에서 신교개혁가들을 박해하자 츠빙글리는 이 주들에 대한 식량공급 등 경제제재를 가했다. 이에 이 5개 주는 연합해서 취리히를 공격했고 츠빙글리는 이를 저지하려는 카펠 전투에서 전사했다(1531년). 개혁파 도시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루터는 그의 죽음을 '폭력적 수단으로 종교개혁을 성취하려한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혹평했다<롱아일랜드 연합감리교회>.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프랑스 용병이 된 스위스 젊은이가 약 2만2천명이었고, 그 중 약 44%만 귀향했다고 한다. 그 중 15%는 부상당한 상태로 돌아와서 29% 정도만 정상적인 삶에 복귀했다는 연구가 있다(요한 하인리히 바저, 정미현 전게논문). 용병 수입과 부상·사망 등으로 빚어진 손실을 비교하면 오히려 손실이 훨씬 크지 않았을까. 츠빙글리는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기보다는 좀 가난하더라도 농업과 목축으로 스위스 사람들이 먹고 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용병제도를 금지한다고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이 그만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진정한 신앙을 되찾으면 사회개혁은 저절로 되었을 텐데, 츠빙글리는 너무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았다.
츠빙글리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자기 의견에 반대한다고 식량공급을 금지한 것은 사랑을 설파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종교개혁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정치적 힘을 이용해서 마음의 문제를 바로 잡을 수도 없다. 외부의 힘에 의한 변화는 겉으로만 승복하는 위선을 낳을 뿐이다. 마음의 변화와 믿음은 자기희생과 양보의 미덕을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얻어지는 게 아닐까. 종교개혁은 정치적 해결 보다는 신앙, 마음을 바로 잡는 일에 우선해야했다. 츠빙글리가 남긴 과제는 교리를 잘 정비한 칼뱅으로 넘어가게 된다.
잼버리 대회 실패와 ‘잘하겠다는 마음부족’
얼마전에 새만금 잼버리 행사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한심한 것은 관계기관들이 네 탓 공방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는 예산을 끌어오는 수단으로 행사를 이용했고, 공무원들은 해외 출장 등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고, 행사를 잘 치르려는 마음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원들을 분산배치 할 때 참가하지 않은 예멘사람들을 위한 숙식준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잘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는 88올림픽 등 여러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다. 요즘 생각해보니 그 성공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잘 해 보겠다는 마음과 책임감의 결과였다. 지금의 정신 상태로는 앞으로 한국의 발전과 생존을 기약하기 힘들 것 같다. 잘하겠다는 마음을 되살려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정신개혁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