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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Apr 03. 2024

서북청년단 제주지부장 김재능

[제주4·3항쟁 76주년] 4·3 삼대폭한(三大暴漢)➀

제주4·3의 학살을 겪으면서 섬사람들은 서북청년단 김재능 단장과 계엄군 제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卓聖祿) 대위, 그리고 제주비상계엄령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 대위를 삼대폭한(三大暴漢)이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김재능이 가장 포악하였다.  

    

사람들은 서북청년단을 줄여 '서청'이라 불렀다. ‘서청’은 오늘날까지도 나이 든 제주 사람들에게는 악몽의 이름이다. 제주4·3이 터지기 직전까지 제주에 들어온 서청 단원은 5백 명에서 7백 명 정도였다. 이후 제주4·3이 발발하자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으로 5백 명, 여순사건 직후 1천 명 이상의 서청 단원들이 추가로 들어왔다. 제주도는 그야말로 '서청판'이 되고 말았다. 좌익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그들은 ‘제주도 사람 90%가 빨갱이’라며 섬나라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서북청년회 회원증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중에서 <태극기 강매>

이들은 김일성 정권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자 이를 피하여 빈털터리로 남쪽으로 넘어온 자들이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그들의 이러한 처지를 십분 활용했다. 사설 단체인 그들에게 경찰권을 쥐여 줬지만, 봉급은 없었다. 알아서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하거나 각종 이권에 폭력적으로 개입해 생계문제를 해결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밉보인 사람은 4·3 와중에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들이 찍으면 누구라도 빨갱이가 되었다. 청년들을 잡아들여 매질하다 보면 이들을 빼내려는 가족들로부터 부수입도 챙길 수 있었다.     

 

서북청년단 제주지부 사무실이던 2층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서청’ 사무실 자리는 제주시 구도심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건물은 일본 강점기에 함석 그릇을 팔던 일본인 상점이었다. 해방 후 이 건물은 적산가옥 규정에 따라 재산관리처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1층은 일본 상점 점원이던 강성옥이 불하받았다. 건물 2층은 비어 있었는데 나중에 ‘서청’이 이를 빼앗았다. 그런데 그 수법이 악랄하기 이룰 데 없었다. 1층 주인인 강성옥이 제사를 지낼 때, 서정은 2층 바닥에 구멍을 뚫어 제상 위에 오줌을 갈겼다. 이를 항의하던 강성옥은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결국, 그는 건물에서 쫓겨나야 했다. ‘서청’의 횡포는 힘없는 일반 도민에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북제주군수 김영진은 서청 단장 김재능에게 맞아 팔이 부러질 정도였다.      


특히 물자 보급을 맡은 관리들은 서청의 주 표적이 되었다. 도 행정의 이인자인 총무국장 김두현도 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서청은 구호 대상자가 아니면서도 억지를 쓰며 총무국장에게 구호 물품의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총무국장 김두현은 구호 대상자에게 줄 것도 부족하다며 이를 거절했다. ‘서청’은 이에 불만을 품고 1948년 11월 9일 김두현 국장을 서청 사무실로 연행하여 고문하고 살해했다.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로 김두현 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사무실 밖으로 내다 버려 끝내 숨지게 했다. 제주도 행정의 이인자까지도 보급품 지급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서청’은 자신들의 죄상을 덮기 위해 김 국장을 빨갱이로 몰았다. 김재능은 미군 방첩대(CIC)에 김두현 국장은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미 군정과 군, 경찰 등 수사기관 어디에서도 이 무도한 살인범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살인 범죄자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흐지부지 해버렸다. 방첩대 정기보고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11월 9일 서북청년단원이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폭행 치사했다. 서북청년단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그를 단지 취조할 의도였으며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263호, A-1)' -주한 미 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 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1월 12일~1948년 11월 13일 (No. 987, 1948. 11. 13 보고)


김재능은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이 귀하게 키운 돼지와 닭을 잡아먹는 일은 다반사였고, 금품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을 일삼았다. 제주 4·3연구소 오금숙 연구원이 ‘제주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들의 잔혹한 피해사례들’을 발표하기 위해 채록한 최길두(崔吉斗, 96년 채록 당시 80세) 씨의 증언이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양 아무개가 있다. 그도 결국 죽을 건데 서청 단장 김재능이 그의 누나를 빼앗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게 결정적으로 그를 살린 요인이다. 그보다 못한 사람도 다 죽였으니까. 또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서청 출신 김묵(金黙)도 성산포에서 맘에 드는 여자를 빼앗아 살았다’     


김재능은 당시 제주지역의 유일한 언론기관이었던 제주신보사를 강제로 접수하기도 했다. 당시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용수는 이렇게 증언했다. ‘제주신보가 서청의 감정을 살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서청은 자신들의 권능확대를 위해 신문사를 빼앗은 것뿐입니다. 다만 ‘봉개리 작전’ 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습니다. 1949년 초 2연대 2대대(대대장 이석봉 대위)의 주도 아래 경찰, 서청, 대청이 총동원된 작전입니다.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죽었습니다만 신문에는 그런 이야기를 일절 쓰지 못했고 군에서 발표하는 대로 ‘정당한 군의 작전’으로 다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서청은 이 작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하루는 서청 대원들이 신문사에 들어와 김석호 사장을 구타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새벽 2시께 들이닥친 서청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김재능 단장이 대기하고 있더군요. 당시 30대 중반인 김재능은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콧수염을 길렀고 일본놈들이 신던 긴 가죽 장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는 워낙 악명이 높아 큰 키에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모습만 봐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지요.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조건 구타했습니다. 그냥 구타가 아니고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습니다. 내가 초주검이 되자 김재능은 ‘데려가 처리해!’라고 하더군요. 서청은 날 태우더니 총살 터를 향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함병선(咸炳善) 2연대장이 나를 살려주었습니다. 2연대에서는 내게 군복을 입히고 편집국장 대신에 선무공작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처럼 테러와 협박으로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한 김재능은 서청 특별중대원인 김묵(金黙)을 편집국장에 앉히고 자신은 사장 자리에 올라 더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평양교육대학교를 졸업한 김묵은 상경하여 1960년대 반공영화와 전쟁영화를 찍는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김재능은 제주를 떠난 후 보복이 두려워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의 마지막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제주에서 자행한 범죄행위로 1954년 6월에 경찰에 검거된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포악했는지 피해를 본 사람들이 서청의 보복이 두려워 피해신고를 제대로 못 할 지경이었다. 1954년 6월 8일 자 영주시보의 기사가 그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전 제주신보 사장과 서북청년단 본도 위원장이었던 김재능(金在能) 씨는 경찰에 붙잡혀 현재 국 수사과에서 구속 문초 중이다. 그런데 씨(氏)의 표면적인 죄명은 사기 공갈, 상해, 사문서위조 등 단순한 혐의 밑에서 입건 수사됐던 것이나 본도 각면(各面) 각리(各里)를 막론하고 30만 도민 거의 전부가 김 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인 한 설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씨계통(金氏系統)에 의하여 애매하게 살해되고 상해되며 재산을 강탈되었던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가족들은 지금도 얼른 김 씨에 대하여 보복적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왜냐! 공포는 남아 있다! 본도 유지 수명이 배후조종 호(乎) 당시 행정의 수반자라고 할 만한 지위에 있었고 직접 피해된 한 유지는 만약 경찰이 철저적인 수사를 가하여 법의 삼엄성을 보인다면 대다수의 제주도민은 이에 호응하여 김 씨 수사에 대한 재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제주도민들이 김 씨 수사에 자진적으로 재료를 제공하지 않은 이유에 언급하여 그것은 시간의 경과에도 다소의 원인은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김 씨가 쉬이 석방되어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위구를 느끼고 있기 까닭이며 그 배후를 조종하던 숨은 세력이 아직도 도량하고 있다는 데 유인(由因)한다고 말했다. 동씨(同氏)는 본도 유지 몇 사람이 김 씨 배후에 숨어 4․3사건 당시 도민을 살육의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닐까 하는 중대한 의옥(疑獄)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김 씨 자신이 제주도 유지 몇 사람한테 조종당했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하였다.’   

  

강요배의 '동잭꽃 지다' 중 <서청입도>

2017년 2월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원회’가 발표한 국가공권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됐던 과거사에 대한 반헌법행위자 405명의 명단에 제주 4·3 사건 당시 국가폭력 가해자 8명이 포함됐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과거사 청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제주 4·3사건 당시 반헌법행위자는 조병옥 미 군정 경무부장, 홍순봉 제주경찰청장, 송요찬 9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문봉제 서북청년단 중앙위원장, 김재능 서북청년단 제주지부장,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 탁성록 정보참모 등 모두 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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