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by 윤정란
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3. 대한제국 황제권에 대한 도전(II)
그러나 독립협회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정치 권력 구조에 대한 구상을 둘러싸고 황제와 독립협회 사이에서 격심한 충돌이 벌어졌다. 황제는 러시아와 같은 전제군주제를 추구했으며, 독립협회에서는 황제권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입헌 내각제를 주장했다.³⁷
1898년 10월 독립협회에서는 정부 관료와 함께 개최한 관민공동회에서 헌의 6조를 채택해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헌의 6조 중 “장정(章程)을 실천할 것”은 황제권을 정부 대신과 중추원에서 견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장정은 갑오개혁기에 선포한 홍범 14조와 그 이후에 제정된 각 장정을 실천하라는 것이었다. 황제 측에서는 이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한편으로는 독립협회를 탄압하기 위한 조치를 이미 취하고 있었다. 1898년 2월부터 법부에서는 각급 재판소에 개화를 반대하는 훈령을 하달했다.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거스르고 천한 자가 귀한 신분을 무시하며,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하는 것에 대해 잘못이 큰 경우에는 주살하고 작은 경우에는 징역에 처해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조치했다.³⁸
만민공동회 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황제는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공격했다. 1898년 12월 20일 이후에는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 전제군주정을 성립시켰다.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기 전인 11월에 황제는 전제군주정을 지향한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다음 해인 1899년 8월 “대한국 국제‘를 선포했는데, 이 법은 당시 국제법의 규정을 인용하면서도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귀속하고 국가의 대내적·대외적 주권이 모두 황제에게 속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또한, 이 법은 신민에게는 전혀 권리가 없으며, 오로지 복종의 의무만 있다고 강조했다.³⁹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황제의 절대권이 강화되어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더는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패가 내적 지지 기반이 부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새로운 조선의 주체를 길러낼 수 있는 신교육 운동에 앞장섰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안창호의 학교 설립이었다. 안창호는 탄포리(灘浦里)교회를 세우고 1899년 최광옥과 함께 초등학교기관인 점진(漸進)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신흥 계급 출신 기독교인들의 학교 설립이 활발해졌다. 그들은 직접 교회를 설립하고 그 옆에 학당을 세웠다. 식산흥업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실업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하고 기금을 모집했다.⁴⁰ 황제의 전제정은 새로운 사회 윤리와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추구하는 이 신흥 상공인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서 자신들의 자녀를 육성하기 위해 신교육 운동에 매진했다.
그런데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계기로 황제권이 다시 약화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재정 고문과 외교 고문의 초빙, 일본군의 한국 주둔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이로써 근대 시민사회를 지향하던 집단들은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황제의 권력이 약해지자 이를 기회로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⁴¹ 러일전쟁을 전후해 독립협회를 계승한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만들어졌다. 을사늑약으로 한국이 일제의 보호국 체제로 들어가자 전국 규모의 애국 계몽 단체인 대한자강회가 1906년 3월에 조직되었다. 대한자강회 지부는 하와이를 제외하고도 국내 지부만 32개에 달했으며, 서북지역은 그 절반 이상인 18개에 달했다. 이 중 평안도가 11개로 전국적으로 가장 많았다.⁴² 1906년 10월에는 내적 기반을 더욱 강화하고 확대하기 위해 평안도에서는 서우학회, 함경도에서는 한북흥학회가 조직되었다. 이어 호남 지역에서도 호남학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 8월 대한자강회는 일제의 고종 퇴위 강요에 대한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강제 해산되었다. 대한자강회 간부들은 1907년 11월 다시 대한협회를 조직했다. 이어 1908년 1월 서북학회가 기존의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해 설립되었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호흥학회가 조직되었다. 1908년 3월에는 경상도민들이 교남교육회, 강원도민들은 관동학회를 설립했다.⁴³ 이 중에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것은 서북학회였다. 서북학회는 평안도민들이 주도했다. 당시 한북흥학회는 이 단체를 이끌던 이준과 이동휘의 부재로 거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준은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된 뒤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이동휘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고급무관으로 구성된 효충회(孝忠會)의 동지들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저지하고, 무력 항쟁과 친일파 대신 처단 등을 계획하다가 강화 봉기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⁴⁴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북학회는 평안도민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한북흥학회는 기관지를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북학회 기관지 <서북학회월보>는 서우학회의 <서우> 형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동시에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1907년 4월 전국적인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¹의 창립을 주도했다.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신민회 회원 123명의 96%에 달하는 118명이 서북지역 출신이었다. 직업별로는 교사 31명(25%), 학생 20명(16%), 상공업 50명(41%) 등이며, 이 중 기독교인이 전체의 85%를 차지했다.⁴⁵ 신민회의 표면 단체인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태극서관, 자기회사(磁器會社)등의 거점이 모두 평양이었다.⁴⁶
당시 여러 애국 계몽 단체에서는 입헌군주제까지는 주장했지만, 분위기상 공화정을 주장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서북 지역민들은 <서북학회월보>를 통해 국가의 여러 형태를 소개하면서 공화정 형태도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선전했다.⁴⁷ 동시에 서북 지역민들이 주도하고 있던 비밀조직 신민회에서는 공화정을 주장했다.⁴⁸ 이와 같이 서북지역민들은 구한말부터 공화정 형태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내적 기반을 강화·확대하기 위해 서북 지역민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활동을 선도적으로 전개했다. 서북학회는 전국의 애국 계몽운동을 주도했다.⁴⁹ 32개의 지회를 설치하고 67개의 지교를 운영했는데, 지회는 평안남도에 3개, 평안북도에 19개, 황해도에 21개, 함경남도에 11개, 함경북도에 5개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학교가 압도적으로 많이 설치된 곳은 평안도였다.⁵⁰ 이와 같이 선도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것은 이 지역민들이 조선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선민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서북학회는 기관지 <서우>를 통해 서북지역이 한민족의 기원인 단군과 문명을 전파한 기자조선이 있던 곳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지역민들이 한민족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⁵¹ 그러므로 근대 문명의 전초기지이며 한민족의 발상지인 서북지역에 사는 지역민들이 한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역사는 1908년 이후부터 민족사로 외연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앙드레 슈미드(Andre Schmid)는 그의 책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에서 처음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에서 그러한 관계를 포착했다. 슈미드는 신채호에 의해 신채호에 의해 단군과 민족이 결합함으로써 역사와 민족이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슈미드의 주장대로 서북지역에서 지역 연대감을 강조하기 위해 주장했던 단군 중심의 지역사는 신채호의 근대 역사관과 결함함으로써 비로소 민족의 역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⁵² 이로써 서북 지역민들은 한민족의 주류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단군 신앙과 동일시된 기독교 신앙은 이 지역민들에게 한민족을 구원해야 하는 강한 책임감과 선민의식을 가지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로 대표되는 문명개화의 전초기지, 한민족의 발원지로서 서북지역은 비로소 민족을 대표하는 위치로 격상된 것이다. 황제는 이제 더는 대적할 대상이 아니고, 조선의 왕에서 황제로 이어지는 왕실 중심의 역사는 이제 더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 대신에 ’혼‘을 간직한 민족이 들어섰다.⁵³ 그리고 그 중심에 서북지역이 있었다. 이광수의 주장대로 평양은 ”민족국가, 민족정신, 민족문화의 발생지“⁵⁴이자 미래 민족국가를 책임질 핵심지가 되었다. 이로써 서북 지역민들은 스스로 민족의 핵심 주체로서 자리매김했다.
서북학회에서는 일부 회원의 주도로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교섭해 안창호 내각 설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만으로는 혁신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이를 반대했다. 안창호는 그 대신 망명을 택하고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서북 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 일제와 대항하고자 했다.⁵⁵ 이러한 안창호의 실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지역민들의 도전 상대는 황제가 아니라 제국 일본이었다. 이제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통감부를 통해 일본 상인들의 조선 상륙과 상권확대를 최대한 지원하는 제국 일본과 경쟁해 자신들의 상권을 지켜야 했다. 그것은 민족의 연대와 협력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옮긴이 註]
1) 신민회(新民會)는 상동감리교회 부설 공옥학교의 교사들과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민족운동을 위한 개신교 감리교회 및 장로교회 지원을 받은 항일 비밀결사단체다. 1907년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경희, 김구, 최광옥,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조직 발전되었다. 신민회의 표면적 활동은 교육 계몽, 신식 학교 설립, 신학문 수용 등이 주목적이었으며, 활동 지원은 상동감리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주변 시장 상인, 개신교계에서 비밀리에 지원하였다. 또한, 만주에 한국 독립군을 훈련할 신흥무관학교 훈련기관 설립에 뿌리를 마련하였고, 이후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창립 취지
1907년 4월,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의 교감인 이회영 중심으로 서울 지역의 인사들[2]과 안창호(安昌浩)를 위시한 평양을 중심 서북지역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했다. 신민회가 결성되었을 당시, 국내의 상황은 통감부 및 일제의 감시와 신문법, 보안법 등의 탄압을 받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치활동의 합법성의 한계를 느껴 애국계몽의 틀을 일부 벗어나 투쟁적, 적극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고자 결성한 단체가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표방하였고, 사회 각층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하였는데, 비밀단체임에도 그 활동은 대부분 합법성을 띠고 이루어졌었다.
신민회는 교육 계몽, 신식 학교 설립, 신학문 수용을 주목적으로 하였고, 만주에 한국 독립군을 건설할 훈련기관 설립 및 훈련기관의 훈련장 마련과 식량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하는 토지 확보 등을 추진하였다.
신민회는 경성에 와 있는 지방 인사들을 통해 각지의 개혁 운동가들을 회원으로 가입하게 하였다. 신민회가 조직된 이후 경기, 황해, 평안, 함경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회원 수를 늘려갔다. 근대 이후의 공화정체를 제창한 대표적 조직으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과 공화정체의 근대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즉, 신민회는 실력 양성론+독립 전쟁론에 입각하여 공화정제를 이상향으로 두었다. 이는 근대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이상향으로 지향했다는점에서 의의를 두고 있으며, 민족 교육 계몽운동 및 무장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필자 註]
37) 도면희, 「자주적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 임지현·이성시 엮음,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 2004), 203~204쪽.
38) 같은 글, 204~206쪽.
39) 같은 글, 209~210쪽
40) 장규식,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 연구』, 61~62쪽.
41) 도면희, 「자주적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 214쪽
42) 유영렬, 『애국계몽운동.I, 정치사회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55쪽.
43) 같은 책, 69~81쪽.
44) 반병률, 「이동휘와 한말 민족운동」, <한국사연구>, 84호(한국사연구회, 1994), 172~176쪽.
45) 윤경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일지사, 1990), 72~79쪽.
46) 같은 책, 215쪽.
47) ”국가의 개념 [속]“, <서북학회월보, 1호(서북학회, 1908).
48) 유영렬, 『애국계몽운동. I』, 61쪽
49) 이송희, 『대한제국기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국학자료원, 2011), 160쪽.
50) 같은 책, 179~183쪽. 이 책에는 함경북도에 설치된 서북학회 지회의 수가 5개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포하ᅟ김된 개성군 지회는 황해도에 포함해야 한다. 이를 수정하면 황해도 6개, 함경북도 4개가 된다.
51) 조형래, 「학회(學會), 유토피아의 미니어처」, <한국문학연구>, 31집(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6), 79쪽.
52) 앙드레 슈미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정여울 옮김(휴머니스트, 2007), 420~434쪽.
53) 같은 책, 440쪽.
54) 안병욱 외, 『안창호 평전』(청포도, 2004), 244쪽
55) 같은 책, 134~139쪽; 박찬승, 『한국근대 정치사상사 연구』(역사비평사, 1992), 54~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