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by 윤정란
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4. 제국과의 전쟁(I)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직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¹는 총독부 과장 이상의 관리에 대한 훈시에서 근대 문명화를 위해 병합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암흑의 땅인 조선을 문명화의 세계로 이끄는 데 보호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병합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한국인들 사이에는 근대화를 지상의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폭넓은 여론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⁵⁶ 1910년대 중반까지 의병 전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근대 문명보다는 반일 감정이 여전히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는 그들이 내세운 근대 문명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물리력으로 강하게 억눌렀다.
반면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을 근대 시민사회를 방해하는 황제권의 몰락으로 보아 민주주의를 발흥시킬 기회로 생각했다.⁵⁷ 그리고 이를 주도할 수 있는 세력은 자신들이라고 여겼다. 이를 위해 해외에서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등의 조직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1911년 105인 사건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서양의 압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내에서 지지 세력을 만들기보다는 외교 관계에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105인 사건으로 중국으로 망명한 신민회 회원들은 외교 관계로 독립의 기회를 얻기 위해 1918년에 조직된 신한청년당(혹은 신한청년단)의 결성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⁵⁸ 신한청년당은 중국 상하이의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세계정세가 변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1919년 삼일운동을 계획했다. 삼일운동의 민족 대표 33명 중 한 사람인 김창준의 글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그는 삼일운동을 계획하게 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8년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선언은 세계 모든 약소민족에게 있어 해방의 큰 희망을 주었다. 이러한 서광이 비치임에 따라 우후죽순 격으로 모든 피압박 민족의 궐기는 세계적 대세였다. 일본 제국의 속박 아래에서 신음하던 조선민족도 자유해방의 열기는 불기둥같이 일어났다.⁵⁹
그동안 독립을 준비하던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세계정세에 고무되었다. 그래서 삼일운동을 일으켜 만방에 한국의 독립을 주창하려 했던 것이다. 이 운동은 서북지역에서 시작되었다. 1918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이 이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인 이승훈을 찾아와 거사를 요청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승훈이 주도해 기독교 단독으로 준비하던 중 천도교에서 연합해 운동을 일으키자고 제안한 것이다. 여기에 불교계도 참여해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거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준비 중에 특별한 사건이 생겼다. 그것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고종의 죽음은 국내외의 많은 한국인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삼일운동의 민족 대표로 참가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기독교인이 다른 지역의 운동을 주도했다.⁶⁰ 민족 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이 중 10명이 서북지역 출신이었다. 이승훈(평안북도 정주), 박희도(황해도 해주), 오화영(황해도 평산), 최성모(황해도 해주), 김찬준(평안남도 강서), 양전백(평안북도 선천), 이명룡(평안북도 철산), 갈선주(평안남도 안주), 유여대(평안북도 의주), 김병조(평안북도 정주) 등이었다.⁶¹
삼일운동은 강대한 한국인들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를 본 서북지역 기독교인들과 일제는 1910년대에 자신들이 추구하던 정책과 방향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각기 절감했다. 일제나 근대 시민사회를 구상했던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내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구상해야 했다. 수많은 한국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서북지역 기독교인들과 일제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일제는 1910년대에 자신들이 펼친 정책의 실패 원인을 지역사회에서의 적극적인 협력자 부족에서 찾았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당시 중앙정부에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인물들이 있었지만, 그로부터 10년이 경과하는 동안 지역사회에서의 협력자를 창출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 일제는, 1920년대부터 지역사회에서 힘을 가진 지방 유력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⁶²
한편 삼일운동은 안창호 중심의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이 운동은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뀐, 즉 ‘황제’가 아닌 ‘백성이 이 나라 주인‘이라는 의식으로의 일대 전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⁶³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많은 선언서에서 연호를 ’단기‘로 사용함으로써,⁶⁴ 한민족은 단군의 자손,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조선 신분제 사회와는 완전히 결별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각계각층과 연합해 중국 상하이에 공화정을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많은 서북지역 기독교인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시정부는 모든 한국인이 민족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렇게 수립된 국가 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좀 더 많은 지지기반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외를 비롯해 국내에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서북지역에서는 교회 내의 각 조직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후원·지지하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지지 조직이 붕괴하는 등 지지 기반을 상실하면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대신해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미래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 청년 운동, 농촌 운동 등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제의 근대화 주장과는 달리 청교도 윤리로 무장한 철저한 도덕주의인 인격주의와 민족을 내세웠다. 많은 한국인을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만들기 위해 인격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근대 문명화 주장보다 우위에 서려고 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신용이 없으며, 외교상으로도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회개해야 할 국가라고 보았다.⁶⁵ 그리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청교도 윤리에 입각해 인격 수양에 힘쓴다면 언젠가는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격 수양이란 곧 금욕, 절제, 신용 등으로, 이를 체득한 개인만이 진정한 시민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생활 실천주의를 강력히 주장했다.⁶⁶
그리고 자산가, 농민, 노동자 등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한국인을 일제에 뺏기지 않기 위해 공공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산가들은 일제의 문화통치에 동요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대공(大公)의 정신과 공적 사업을 강조했다.⁶⁷ 자산가와 더불어 농민, 노동자 등 각계각층의 한국인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함께 단결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부를 축적한 이 지역 기독교인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재산을 기부했다. 기독교인들은 기부자의 이름을 딴 도서관과 기념관 등을 지어 정치·사회 운동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⁶⁸ (<II>에서 계속)
[옮긴이 註]
1)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년~1919년)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 정치인, 외교관이다.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1910년 5월부터는 제3대 한국통감이었고, 경술국치 이후부터 1916년 10월 14일까지 초대 조선 총독이었다.
메이지 유신 시대에 군인으로 임관한 뒤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에 출정하였다. 1882년 프랑스 주재무관이 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898년 일본 육군교육 총감을 지냈다. 1900년대 초에는 남만주 철도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1902년 3월 국방부 육군담당 대신이 되었으며, 러일 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자작이 되고 육군 대장까지 승진했다. 1910년 5월 제3대 한국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합병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1916년 총리대신이 되어 시베리아 전쟁 등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의 권익 확대를 꾀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다.
[필자 註]
56) 김동명,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의 근대적 참정제도」 , 《국제정치논총》, 42집 3호 (한국국제정치학회, 2002), 276~277쪽.
57) 박용만 기초,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선포문」(1912년 11월 20일), 『재미한인오십년사』(재미한인회, 1959), 109쪽.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세우고 해외 한인을 대표하여 일할 계제에 임하였으니 형질상(形質上) 대한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바야흐로 발흥 되며”라고 선언문에 기술되어 있다.
58) 김희곤,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집(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 1986), 153~155쪽.
59) 김창준, 「1945년 2월 25일 기미운동 후 오늘까지의 경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엮음, 『기독교 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 유고』(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1), 98쪽.
60)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 기독교의 역사. 2』(기독교문사, 1990), 33~35쪽.
61) 문인현, 「삼일운동과 개신교 지도자 연구」, 《사총》, 20권(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1976), 73~106쪽.
62) 윤해동·황병주 엮음, 『식민지 공공성: 실체와 은유의 거리』(책과 함께, 2010), 138~141쪽.
63) 이만열, 「3·1운동과 기독교」, 《한국기독교와 역사》, 7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9쪽.
64)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61~252쪽.
65) 주요한, 『도산 안창호 전서』(샘터사, 1979, 528, 533쪽
66) 신웅, “청년에게 호소함: 인격완성, 단결훈련에 대하야”, 《동광》, 18호(동광사, 1931), 12~13쪽
67) 장규식,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연구』, 243쪽.
68) 그 예로 백선행기념관, 김인정도서관을 들 수 있다(“횡설수설”, 《동아일보》, 1931년 12월 6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