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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30. 2024

시에 대한 정의

-조지프 브로드스키

시에 대한 정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추모하며

나름의 전설이 하나 있다. 총살당하기 직전 그는 병사들 머리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말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지프 브로드스키     


여자들 방의 창 너머

친척들 집의 창 너머

동료들 사무실의 창 너머

풍경들을 기억해 두는 것.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무덤 너머

풍경들을 기억해 두는 것.   

  

우리가 사랑에 이끌려 나오는 순간

눈은 얼마나 천천히 내리는지

기억해 두는 것.     


우리가 가까운 이에게 사랑을 상기시키는 순간

축축한 아스팔트 위로 깔려진 하늘을

기억해 두는 것.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설명 받는 순간,

유리 위로 흘러내리는 흐린 빗줄기는

어떻게 건물의 균형을 일그러뜨리는지

기억해 두는 것.     


안식처 없는 땅 위로

마지막 남은 곧은 팔이 어떻게 십자가를

내미는지

기억해 두는 것.   

  

달 밝은 밤이면

나무 또는 사람이 드리우는 긴 그림자를

기억해 두는 것.    


달 밝은 밤이면

낡아빠진 바지의 주름처럼 반들거리는

강물의 무거운 파도를

기억해 두는 것.      


그리고 새벽녘이면

호위병들이 돌아서 나오는

하얀 길을 기억해 두는 것.

호위병들의 낯선 목덜미 위로

태양은 어떻게 떠오르는지

기억해 두는 것.     


사랑의 순간뿐만 아니라 고통과 절망, 죽음을 부르는 폭력의 순간까지도 낱낱이 기억하는 것, 그러고도 감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세상에 대한 가장 시적인 정의다.
-시인 진은영   
Joseph Brodsky

이 시는 브로드스키가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8년~1936년)를 추모하며 쓴 시다. 로르카는 서른여섯의 나이로 스페인 내란 중에 파시스트들에게 살해당한다. 그는 총살당하기 직전 총을 겨눈 병사의 머리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래도 여전히 태양은 떠오른다…”고 말한다.    


조지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 1940년 5월 24일~1996년 1월 28일)는 러시아계 미국인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다. 원래 이름은 이오시프 알렉산드로비치 브로드스키(Ио́сиф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ро́дский)이다. 198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 6월 4일에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되어 1977년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 1987년 중요한 서정적 비가(悲歌·elegy)들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문단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독립적 성향과 꾸준하지 않은 작품활동으로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사회주의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1964년 5년간의 중노동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비중 있는 작가들이 이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덕택에 1965년 사면받았다. 1972년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고 1977년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72∼80년에는 중간중간 미시간대학교와 앤아버대학교의 거주 시인으로 있었고 그 밖의 다른 학교에서도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3 exiles from the USSR- Nobel laureate Joseph Brodsky, dancer Mikhail Baryshnikov, cellist and conductor Mstislav Rostropovich. Photo by Leonid Lubyanitsky


그의 시는 개인적 주제들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 같은 보편적 관심사를 강렬하고 사색적인 필치로 다루고 있다. 러시아어로 쓰인 초기작품 가운데는 〈운문과 시 Stikhotvoreniya i poemy〉(1965)·〈황야의 정거장 Ostanovka v pustyne〉(1970)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이 조지 L. 클라인에 의해 영역되어 〈시선집 Selected Poems〉(1973)으로 나왔는데, 특히 유명한 〈존 던을 위한 비가 Elegy for John Donne〉도 실려 있다.     


러시아어와 영어로 쓰인 중요한 작품으로 시선집 〈연설의 일부 A Part of Speech〉(1980)·〈20세기의 역사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1986)·〈우라니아에게 To Urania〉(1988)와 산문 모음집인 〈1보다도 작은 Less than One〉(1986)·〈슬픔과 이성에 대해 On Grief and Reason〉(1995)를 꼽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와 자신의 인연을 조용하면서도 치밀한 문체로 다룬 산문인 〈Fondamenta degli Incurabili〉(1991)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수작 가운데 하나이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8년~1936년)는 스페인의 시인·극작가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연극의 영향 밑에 놓여 있었던 스페인 연극을 혁신하고, 더욱이 외국의 극단에도 영향을 끼친 대작가 로르카는 가장 애도해야 할 스페인 내전 중의 희생자의 한 사람이었다.  

Federico García Lorca

그라나다 근처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총살된 이 시인은 미국을 여행한 후, 1931년에 극단 '바락카'를 조직하고 스페인 고전연극의 부흥에 분투, 이어 3대 비극 <피의 혼례>(1933), <예르마>(1913),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1934)을 완성했고, 시와 극이 융합하는 경지를 민족적인 소재 중에서 실현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 연극의 중요한 상연 종목이 되어 있다.     


스페인의 전통적 서정을 현대적으로 표현했으며 향토인 안달루시아의 마을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노래했다. 최초의 <시의 책>(1927)에 이어 <집시 시집>(1927)에서 그의 시는 성숙해졌다. 작품도 실험적인 시도를 구사했으며 항상 민중을 떠나지 않았다. 시는 주제나 그 형식과 수법이 잡다하고 음악적·연극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데 용어에 있어서는 어느 때는 철없이 보이고 어느 때는 신비한 베일에 싸여 있다.


로르카는 1898년 그라나다 지방의 푸엔테바케로스(Fuente Vaqueros)에서 대지주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마드리드로 가기까지 20년 동안 그는 그라나다의 라베가 평원에서 안달루시아의 예술적 유산을 먹으며 성장했다.     


1919년 로르카는 그라나다를 떠나 10년 동안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의 레시덴시아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1920년대 스페인은 예술적 매혹이 넘쳐 났던 시기였으며, 수많은 천재가 동시대의 공기를 함께 호흡했다. 시에는 후안 라몬 히메네스, 헤라르도 디에고, 호르헤 기옌, 페드로 살리나스, 다마소 알론소, 라파엘 알베르티가 있었고, 회화에는 살바도르 달리가, 영화에는 루이스 부뉴엘이 있었다. 로르카는 히메네스에게서 시를 배웠고,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우정을 나누며 예술적인 비전을 교감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모더니즘을 흡입하며 시를 쓰고 연극을 무대에 올리며 1928년까지 머물렀다.     


1920년에 로르카는 희곡 <나비의 저주(El maleficio de la mariposa)>를 무대에 올렸으나 관객의 반응은 냉담했다. 1921년에는 ≪시집(Libro de poemas)≫을 출간함으로써 공식적인 시인이 되었다. ≪시집≫을 출간한 후 칸테 혼도를 시로 쓰기 시작했고, 이 시들은 10년 후에 ≪칸테 혼도의 시(Poemas del Cante Jondo)≫(1931)로 출간되었다.     


1927년에 역사극 <마리아나 피네다(Mariana Pineda)>를 무대에 올려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해에 시집 ≪칸시오네스(Canciones)≫를 발표했다. 그러나 로르카를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로르카로 인식시킨 작품은 시집 ≪집시 로만세(Romancero Gitano)≫(1928)였다. 시인은 소외받는 집시라는 현실을 신화적인 이야기로 변형시킨 다음, 그것에 꿈의 언어로서의 초현실주의를 덧입힌다.     


1929∼1931년에 로르카는 뉴욕에서 몇 달을 보내며 새로운 현대 도시의 날카로움을 경험한다. 유럽에서는 표현될 수 없는 신세계의 도시적 분위기는 로르카의 내면에 초현실주의에 대해 더욱 강한 욕구를 불어넣었다. 시집 ≪뉴욕의 시인(Poeta en Nueva York)≫과 희곡 <관객(El público)>은 거의 같은 시기에 뉴욕과 쿠바에서 초현실주의라는 악령에 사로잡혀 써 내려간 것이다.     


1931년부터 스페인 공화 정부 교육부의 지원으로 로르카는 ‘라 바라카’라는 극단을 창설하고 연극을 쉽게 볼 수 없는 민중을 위해 순회공연을 다니게 된다. 이 시기부터 극작가의 힘이 시인의 힘을 능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안달루시아를 배경으로 한 3대 전원 비극 <피의 혼례(Bodas de sangre)>, <예르마(Yerma)>,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La casa de Bernarda Alba)>은 이때부터 1936년 처형되기 전까지 집필된 것이다.


1936년에 들어서면서 스페인에는 파시즘의 유령이 떠돌기 시작했다. 로르카는 동성애자, 집시 옹호자로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은 시민전쟁에 돌입했고 로르카는 시인이자 고향 친구인 루이스 로살레스의 집에 피신했다가 그라나다 국민전선 사령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1936년 8월 20일 새벽, 청색 하늘 밑에서 로르카는 임시 감옥에서 끌려 나와 비스나르와 알파카르 사이에 있는 벼랑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

Brodsky and Sozzani

Joseph Brodsky and Maria Sozzani: 5 of the happiest American years of the poet's life - Forum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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