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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이다

드디어 월동준비(越冬準備)

1960년대 적산가옥(敵産家屋)에서는

36세대가 살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북에서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 사람들이

일본이 사용하던 유곽(遊槨)을

주거지로 사용하며 지내면서

"이웃"이 된 것이다.


이들의 출신은

조선팔도(朝鮮八道)에서

오신 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  

심지어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투리가 섞여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침은

팔도의 사투리가 하모니를 이루어

맑은 아침에 메아리쳐 울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들의 삶은

2024년을 기준으로 하면

기초생활수급자에 해당할 정도로

어려웠다.


하루벌어 하루먹는 하루살이 인생이

36세대가 살아가는 삶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계절은

다름아닌 겨울이었다.


겨울나기.

최대의 과제였다.


길고긴 시간

영하20도가 되는 것은 보통.

아스팔트도 아닌 흙탕 길에

간밤에 내린 눈 위에

수북하게 쌓아 다타버린 연탄재.


며칠 뒤 삼한사온(三寒四溫)에 의해

녹아버린 눈이 연탄재와 뒤섞여

모든 거리를  질퍽하게 만들어 버린.


다시 얼어버린 길 위에

쌓인 눈은 흰색인지 회색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길고긴 겨울로

일당(日當)을 버는 일자리 찾기는

쉽지않고,

베이비 붐(Baby boom)시기에

적어도 다섯에서 여덟명의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달동네의 고민은

다름아닌 "김장준비"였다.


그래도 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강력한 힘은

"상부상조(相扶相助)"  정신의 실천 덕분이다.


당시 한 집에서 김장은

약100~200포기를 담그는 것이 상례이다.


김장을 담글때면

적어도 10~12명의 아낙네가

한집에 모여서 힘을 합친다.


외양상으로는 품앗이가 되겠지만

약30%에 해당하는

즉 전혀 김장을 담글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가정들은 김장담그기에

손을 보탤 뿐이다.


그래도 김장담그기가 끝나면

반드시 겉절이, 속을 비롯하여

한두포기의 김장을 나누게 된다.


모두 36세대가 되니까

한 집에서 두-세포기를 얻게 되면

약70포기 정도의 김장을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마련한 김장을 가지고

7~9식구는 겨울을 난다

부족한 듯 보이지만

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신기한 사실은

이렇게 얻은 김치가

조선팔도의 각양각색  김장특색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김장은 영숙이네 것인데

 함경도 맛이 깊이 들어있네."


"오늘은 명철이네 김장이라

  백김치라서 맛이 또 달라.

  서산이라고 했는가?"


매일 마주하는 김치맛을 보면서

김장 품평회는

가족들에게 새로운 이야기꺼리를

제공한다.


이젠 김장을 담그는 집도

찾아보기 어렵고

이웃들이 한 집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웃간의 정을 교환하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60년전 가장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기의 김장나누기가

더욱 그립다.


이웃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겨울나기의 김장담그기.


참 좋은 전통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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