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범하게 행복할 용기 이계윤
Nov 16. 2024
그래요.
산다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어찌보면 허무함
그 자체인 것 같아요.
멀리서 보면
낳고 힘들게 살다가
설령 힘들지 않게 살았다 하여도
홀연히 떠나버리는 생.
이름을 남기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라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
그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생각에 깊이 몰입되다 보면
이 땅에서의 삶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이 있지요.
모든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지구를 왔다가 떠나간 사람
앞으로 지구에 찾아올 사람
그리고 오늘 지구에 살고 있는 나와 우리.
왜 살아가고 있을까요?
모두 다 삶의 의미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호흡하고 있는 것일까요?
커다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땅에서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왜
허무해 보이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이 땅의 삶을 놓치지 못하고
부여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때로는 대단한 의미 있는 것처럼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마치 이땅에서 이름을 남기면
영원히 기억될 것처럼
몸부림 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하는 나도
이 글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이 질문 앞에
무엇인가 대답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바로 이것이 삶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는 것처럼
바로 그 신비의 늪 안에
우리의 삶이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것
또 외적으로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삶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나가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왔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호흡 끝나고 나서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그 미지의 영역이
어쩌면 우리 삶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땅에서 호흡하는 칠팔십 년
길면 백년의 시간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곳의 시간
또 떠나서 가야 할 곳의 긴 시간의 길이
그 시간의 높이, 깊이가
바로 삶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멈추게 할 이유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무의미하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짧다는 것입니다.
더 길고 긴 우리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비록 이땅에서 고통스럽고 힘들고
또는 냉소적으로 바라보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중지시키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지나칠 정도로 짧다는 것입니다.
소록도를 방문해 보았습니다.
한센병으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고통당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멸을 당하고
멸시를 당했던 그분들.
일제 치하에서
또는 광복이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이분들을 향한
사회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력을 잃고 손가락 발가락
마디마디가 떨어져 나가고
정말 각종 종양이 생겨도
이분들은 살아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이제는 한센병을 완전히 퇴치시킬
치료약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이분들이 겪지 않아야 될
고통을 겪고 살아온 것입니다.
이분들로 인해서
각종 피부질환과 관련된 치료약이 개발되고
그 혜택은 한센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누리고 있습니다.
소록도를 방문하면서
다시한번 생각합니다.
죽고싶은가요?
이 세상을 빨리 떠나고 싶은가요?
글쎄요.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여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가치와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