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아들 사랑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처음으로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했다.
늘 구부정한 자세로
목발을 짚고 다니던 나에게
허리를 곧게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힘이 없이 흐느적 거리던 오른쪽 다리가
이제부터 힘을 받기 시작했다.
비록 목발을 짚은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보조기에 의지하여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그 때까지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육중(肉重)한 체구를
오로지 왼쪽 다리에만 의지해서 다녔기에
왼쪽 다리가 휘어져있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도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하면서
왼쪽 다리가 무리하지 않은
최소한의 배려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이 그렇다.
"술과 담배가 건강에 좋지않다.
마약과 음주운전은 더 나쁘다.
과로도 무익하다.
밤을 새면서 의자에 앉아
게임을 하는 것도
신체와 정신건강에 매우 해롭다."
아무리 외쳐도
이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를 해도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끔찍한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꺼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1970년대 중반의 보조기 산업은
매우 초보적이었다.
보조기를 제작하는 기술이나
재료도 형편이 없었다.
소비자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 보조기를 착용하고 어디든지 다녔다.
약 7년이 지났을 때
스무살 중반에 이르렀을 때
일제보조기와 독일제보조기가 수입되었다는
정보를 듣게되었다.
알루미늄 재료로서 가볍고
강도(强度)와 탄성도(彈性度)도 높다고
들었다.
조금 비용을 높여서
일제(日製)보조기로 바꿨다.
몸이 한층 가벼위졌다.
더욱 신이 나서 이곳저곳으로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주일아침이었다,
고등부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로 가던 중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도중.
갑자기 "뚝"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육체가 휘청거렸다.
영원할 것 같았던 보조기가 부러진 것이다,
나는 넘어져
땅바닥에 곤두박질 하고 말았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손바닥은 까져서 피가 흥건하게 고였다.
나는 왼쪽 다리에 의지하여
목발을 짚고 비틀거리며
공중전화 박스로 다가섰다.
"아버지. 보조기가 부러졌어요."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셨다.
급한 성격의 아버지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막내아들의 부러진 보조기만을
바라보셨다.
급히 부러진 보조기를 들고 사라지셨다.
아마도 철공소(鐵工所)를 찾아
달려가신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에 문을 연 철공소가
과연 있을까?
예배시간이 다가오는데."
보조기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로
나는 힘겹게 교회로 다가갔다.
다시금 보조기가 나에게 준 효율성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었다.
보조기를 착용한 두다리에
전적으로 의지했던 내가
다시 한번 한쪽 다리에 의존해서
설교단상 위에 서 있어야 했다.
진땀이 흘렀다.
다시는 보조기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내가 되었다.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1시 30분이 다되어
아버지는 수리된 보조기를
보자기에 싸서 달려오셨다.
부러진 알루미늄 보조기를
투박한 쇠조각으로 땜질해서
가져오신 것이다.
나는 수리된 보조기를 착용하고
다시 자리에 일어섰다.
소아마비로 장애를 겪는 아들에 대해
아버지는 늘 죄인이었다.
일요일 아침.
보조기를 자전거에 싣고
문을 연 철공소를 찾아
체면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다니신
아버지의 사랑.
그 사랑은
나에게는 "빚(debt)" 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