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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i haru Dec 21. 2024

살아온 시간을 가로지르다

그날

그와의 사랑이 시작된 그날



귓가에 들려온 낯선 역 이름에 눈을 떠 보니 다음 정차역은 제물포역이었다. 졸업 작품 만든다고 며칠 밤새워 피곤했구나. 담담한 마음으로 맞은편 승강장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눈에 띈 한 사람. 여럿이 모여 있는데 키가 크고 아이보리색의 환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스치듯 마주친 눈빛을 뒤로한 채 제물포역이라고 쓰인 승강장에서 다음 열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혼자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다 적막함이 느껴질 때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전철 안 창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했다는 사연을 듣고, 나에게도 우연한 첫 만남의 사랑이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기다리던 열차를 타고 역에 내려 걷고 있는데 누군가 따라왔다. 뒤돌아보니 그가 아니었다. 관심 없는 듯 그냥 걸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자기가 아니라 친구를 대신하여 왔다고 연락처를 알려주면 전해주겠다고 한다.



순간, 그토록 꿈꿔 온 사랑인가.



우리 사이는 그날 시작된 만남으로, 9년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지금은 서로의 시간이 삶에 안온하게 스며들어 무엇인가 말하지 않아도 묵묵한 마음으로 챙긴다. 사랑은 그 사람이 지닌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는 것이기에.






사랑 셋, 시작된 그날



다시 돌아본 순간, 뒤돌아 나가는 우리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에서 스며 나오는 선명한 눈빛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움직이기 힘든 좁은 철장에서 보관된 기록도 사라진 채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사연을 외면할 수 없어 입양하기로 결정하고 필요한 등록 절차를 마친 후 우리 품에 안겼다. 털에 배인 지독한 냄새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흐름과 고통이 느껴졌다.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 내가 좋아하는 과일에서 체리로 정하고 '체리야'하고 불러 보았다. 귀를 쫑긋하더니 반응을 보였다.

너의 생일은 오늘이야. 11월 17일. 우리 셋이 함께 살기 시작한 날이었다.





체리는 태어난 지 3~4년 정도 예상하면 될 것 같아요. 검진 결과에서 심장사상충이 폐에서 발견되어 위급한 상황이라 빠른 치료가 필요한데, 치료 기간은 1년 정도이고, 완치 못하면 다시 1년을 동일한 과정으로 치료하는데, 치료 과정에서 매일 복용하는 약 성분이 강해서 체리가 견디기 힘들 수 있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심장사상충이 체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니,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힘든 시간 견뎌내 줘서 고마워. 죽지 마. 지금이라도 치료받을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곁에서 무서워 떨고 있는 체리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만약 심장에서 발견되었다면 치료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막연한 감정이 들었을 테니까.


긴 시간 통증을 견뎠다. 두 번의 치료 과정을 거치고 심장사상충이 완치되었다. 살아내려는 의지로 이겨낸 것이라고 한다.


사랑으로 얽힌 시간이 선물로 다가왔다.



긴 호흡으로 써 내려간 사랑

치유의 시간으로
상처의 아픔을 이겨내는 마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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