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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신미 Feb 04. 2024

나의 손님들

‘손님’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 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기는 한데 무언가 미진하다. 영어에서의 guest나 hospitality는 그 어원에 낯선 사람과 주인이 둘 다 포함되며 상호 호의의 의무가 있는 관계라는 뜻이 들어 있는데, 그것을 다 합쳐도 어딘가 부족하다. 내 영역을 찾아 주었기에 존중과 환대를 주고받아 마땅하며, 서로의 신비로움에 경의를 품고 바라봐 주는 존재. 그래서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 중)라고 했나 보다. 어디 사람이 오는 것만 어마어마한 일이겠는가. 존재적 의미로 다가오는 모든 조우가 어마어마한 일은 아닐지. 나에게 있어서 손님은 반갑고 귀하고 고마운, 내 인생을 찾아준 모든 존재다.


미국에서 한인으로 살면 이래저래 많은 손님을 맞고 보내게 마련이었다. 특히 팔구십년대 즈음엔 먼 타국에서 동포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큰 인연이고 반가움이라 서로 신세짐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일찍 유학을 가서 먼저 자리를 잡아가던 나의 집에는 유난히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친척이나 그들의 지인들이 오면 공항에서부터 학교나 직장을 찾을 때까지 몇 달이고 함께 지내곤 했다. 그들이 오면서 비행기에서 알게 된 사람까지도 갈 곳이 정해질 때까지 일단 나의 집에 머문 적도 많았다. 이쪽 방에는 우리 식구가, 저쪽 방에는 한 무리의 손님이, 그리고 또 다른 방에는 다른 무리의 손님들이 머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학업과 일을 병행하던 나는 서툰 살림 솜씨와 빠듯한 형편 때문에 정성껏 대접을 다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종종 시달리곤 했다. 그래도 다행히 손은 큰 편이라 음식의 양만큼은 늘 풍성히 해 두었던 것 같다. 그 손님들 중에는 훗날 유명해져서 잡지나 방송에서 종종 보는 사람도 있고, 그때는 가명을 사용해서 몰랐으나 알고 보니 유명한 집안의 자제였던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이들은 머물던 방에 감사의 편지를 남기고 간 이들이다. 그런 손님들이 떠나고 나면 나는 감동과 섭섭함으로 그 빈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그들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마음을 적셨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 하지만 내 인생에 꽃도장 하나씩을 찍어 놓고 떠난 사람들. 

 

성경에서는 자식들이 태의 열매, 화살 통에 가득한 화살, 보물이자 축복 등으로 비유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요즘엔 효녀 효자이면서 친구 같은 자식이 희망사항으로 공감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 자식이란 항상 내 인생의 손님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나는 그들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힘들고 부담되는 어려움은 물론 아니고 한없이 존중하고 고이고이 대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존재 말이다. 따끔하게 야단을 쳐도 자존감은 건드리지 않아야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 어려운 ‘사람’들.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와서 아득한 먼 곳으로 흘러가는 길목, 이생에서, 부모 자식으로 머물다 간다는 건 정말이지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자식이라는 존재가 하도 놀라워서 나는 아이들을 마구 대한적이 없다. 언제든 자기 몫의 생을 찾아 훨훨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섬겨온 손님들이다. 어미의 이런 태도 때문에 그들은 조금쯤 외롭곤 했을까. 그것은 그들의 몫으로 둔다. 


산세베리아, 커피나무, 청페페, 제라늄, 인도고무나무, 안시리움, 드라세나 드라코 (용혈수), 천리향. 요즘 우리집에 찾아와 머무는 초록 손님들이다. 흔히 반려식물이라는 이름으로 동반자나 가족으로 여긴다고 하나, 나에게 이들은 손님들이다. 예의 바르고 생명감 충만한 손님들. 이들은 어디서 출발해서 어느 긴긴 시간의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와서 초록으로 나와 조우하고 있는 것인지. 그 시간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물결 모양, 하늘 모양, 새의 날갯짓 모양.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나 이 손님들은 아주아주 천천히 그리고 미세하게 각자의 스피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값이 나가거나 귀하신 몸으로 분류되는 화초는 아니어도 다 내 집에 찾아와 머물다 가는 생명이다. 여기저기서 얻은 것을 살려 분갈이와 삽목으로 개체수를 늘려 보고, 햇빛과 물, 환기를 조절하며 관찰하는 재미가 크다. 틈틈이 잎사귀를 하나하나 닦아주며 친해지는 즐거움도. “우리는 자연에 초대된 손님들입니다. 자연에 예의를 갖추십시오” 라는 훈데르트 포스터의 문구를 떠올리며 나는 나의 초록 손님들과 언제 어떻게 헤어지게 될지 궁금하다. 적당한 호스트가 있다면 얼마든지 보내 드려야지. 


생각해 보면 손님이 좋은 것은 만나고 또 헤어지기 때문이다. 헤어질 때는 서로의 존재가 축복과 함께 봇짐 속에 묻어 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고받은 마음이 나의 존재의 원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손님들과 함께한 시간들을 반추하며 또다른 손님을 맞을 빈자리를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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