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gaze into the abyss
명상은 마음이 편해지거나 고요함을 얻는 기술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나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차리는 의식과 감각의 훈련에 가깝다. 그리고 그 길의 한 가운데 언젠가 마주하게 되는 저마다의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은 우리가 외면해온 감정,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오래된 상처와 형체없는 고통들로 이루어진 깊고 어두운 공간이다. 명상은 그 어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계속해서 의식의 빛 안으로 데리고 오는 연습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나의 경우 수 년의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살아가면서 새로운 어두움을 마주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더이상 그 속에 빠져버리거나 외면하는 대신 '처음 보는 친구가 왔네' 하면서 조금은 여유롭게 맞이하고,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 머무름이 때로는 피하고 싶을 만큼 반갑지 않고, 여전히 옅은 아픔이 전체를 서서히 물들여가는 고통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파도 옆에 앉아있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며칠이고 앉아있다보면 그 친구와 대화를 조금씩 나누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손을 잡거나 꼭 안아주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빛의 영역으로 데리고 갈 수 있을 때까지 서두르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
개념적으로 세상에 나라고 할만한 고정된 자아가 없음을 이해했어도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경험들이 몸과 마음에 저장되어 있기에 그에 맞는 방식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해소해 주어야 가벼워질 수 있다. 딱딱하게 굳어진 감정 덩어리들이 어딘가 남아있다면 그 아픔과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안아주어야 한다. 머리로 이해했다고 결코 끝나지 않는다. 함께 울고 웃고 어루만져줄 때 비로소 나아갈 수 있음을 이제 안다.
"화이트를 즐겨입던 J가 블랙을 편하게 소화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빛이 자신의 것이 되면 어둠 또한 편안하게 embracing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아무리 밤이어도 구름 뒤엔 늘 빛이 있다는 어디에선가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며칠 전 친구가 남긴 짧은 이 글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 예전에 제일 좋아했던 블랙 셔츠를 오랜만에 입은 날이었다. 살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고, 일상을 함께 보내지만 모든 사람들과 마음 공부, 명상을 나누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른데다 모든 사람이 알아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실 모르고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겠다고 내심 부러웠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이번 생에 비슷한 경험을 하며 같은 주제로 대화가 통하는 친구와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그보다 반가운 것도 없다.
과거 나의 옷장은 블랙과 네이비, 그레이가 대부분이었다. 타는 차도 늘 블랙이나 다크 그레이였다. 그러다 어느 시기를 지나며 일부러라도 밝아지고 싶어서였는지 입는 옷도, 차도 화이트를 선호하게 되었다. 한동안 그렇게 주위를 밝고 환한 것으로만 채우고 있는 나였다. 마치 어두운 곳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이.
모든 것이 강물처럼 흘러가듯 그 시기가 지나가고 마침내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된걸까.
명상으로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탐구하게 되고, 배우고 수련하면서 현실의 내 삶은 무척 많이 바뀌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할 지 막막했던 거대한 덩어리가 해체되고 분해되어 녹아내려 이제는 압도되지 않고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는 적당한 크기가 되었다. 물론 상처와 균열이 남아 매끄럽지만은 않은 모습이지만 그것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 투명한 고요함이라는 선물이 놓여 있었다.
너무도 유명한 칼 융이 남긴 글,
"One does not become enlightened by imagining figures of light, but by making the darkness consciuous."
"사람은 빛을 상상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을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옴으로써 빛을 본다."
언제나 두려움이 아닌 자비와 사랑으로, 빛을 향해 나아가기를.
Shanti Shanti Shan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