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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cey J Feb 03. 2024

Living small 2

간결한 삶, 두 번째 이야기 

펜스 에 주황색 공 두어 개가 나란히 돌아와 있는 날이 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집을 향해 마음 속으로 외친다. 

일주일 전 태어난 망아지처럼 펄쩍펄쩍 뛰노는 대형견에게 공던지기 놀이 (Fetch)는 중요한 하루 일과다. 

신나게 공놀이를 하다보면 심심찮게 펜스 너머로 공이 넘어가 버리곤 한다. 알고보니 펜스 너머 드넓은 들판은 옆집 할아버지 소유의 토지였다. 한 편에 나뭇가지와 각종 막대를 엮어 만든 네모난 공간이 보인다. 

자동차 두어 대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공간에 새빨간 것이 언뜻 보이기에 가까이 가보니 어이없게 탐스러운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돌아가는 선풍기와 식당에서 쓰는 싱크대 비슷한 집기가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다. 무더운 날에도 낡은 모자를 쓴 그가 토마토를 따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할아버지의 채소 정원이다. 

바람이 불때 마다 선풍기의 은색 날이 빙글빙글 돌았다. 저건 무슨 용도일까? 






지금까지 고양이 가족은 총 다섯마리로 파악되었다. 1인자는 덩치 큰 샴 고양이, 가장 자주 목격되는 고양이로 묵직한 포스를 풍기며 주인 행세를 한다. 결코 황급히 도망가거나 겁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종종 할아버지 창고 외벽 지붕 아래 공간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관찰한다. 샴 고양이가 먼저 식사를 하면 어디선가 뚱뚱한 진회색 고양이가 스윽 나타난다.  둘 사이는 서먹해 보일 정도로 적당한 거리가 있지만 서로 신뢰하는  것 같다. 우리 집 오두막 문 앞에서 목격된 줄무늬 회색 고양이는 스노우볼이라 이름 붙였다. 스노우볼은 무척 겁이 많은 어린 고양이로 우리 집을 자주 드나들어 눈도장을 찍은 녀석이다. 다가가면 도망가 버리는 스노우볼이 눈에 밟혀 한구석에 고양이 밥그릇을 두고 채워주었다. 그 외에 새까만 어린 고양이와 모찌떡같이 둥그런 얼굴에 흰색과 회색이 믹스된 뉴페이스 고양이가 있다. 

할아버지는 저 고양이들은 이름도 없고 내 소유가 아니라고 성가신 듯 말했지만, 매일같이 다섯 마리 고양이의 식사를 넉넉히 챙겨주는 모양이다. 내가 놓아둔 밥그릇은 매일 비워지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만 줄어들기 때문이다. 


스노우볼이라 불리는 줄무늬 고양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골 집에서의 일상은 웅크린 채 경직된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다. 

1900년에 지어진 낡은 집은 살면 살수록 알게되는 매력이 있었다. 물론 걸을 때마다 삐그덕 거리는 나무바닥과 오래된 히터 시스템으로 인한 소음은 적응 기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거실 바닥 한가운데 있는 에어컨/히터는 정사각형의 두껍고 무거운 철로 만들어진 그물형 덮개 사이로 바람을 내보낸다. 세월의 멋을 입은 앤틱 중의 앤틱으로 이 지역의 노련한 부동산 중개업자 아주머니조차 신기해 했다. 비행기 내부에서 나는 소음과 흡사한 위잉-하는 소리를 내며 에어컨 겸 히터는 희한하게 잘도 돌아갔다. 다행히 설정해 놓은 온도에서 떨어지거나 올라가면 자동으로 켜지게 되어 있어 소음은 하루 종일 들리지 않았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데다 수상할 정도로 예전에 살던 집에 비해 전기세와 가스비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아늑한 다이닝룸은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식물들로 초록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햇살이 가만히 드는 오후에 식탁에 앉아 창 밖의 단풍나무를 바라볼 때면 무언가 뜨끈한 것이 심장 주위로부터 퍼져나가는 듯 하였다. 





저녁엔 펜스 앞에 놓여진 fire pit 앞에 앉아 노을을 하염없이 보았다. 노을이 지는 들판을 노니는 사슴, 가끔씩 나타나는 들토끼, 자유로운 새, 바람, 나무, 하늘의 구름...... 모두가 나의 친구같았다. 그 순간 우리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었다.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면 멈추지 않는 마음 속 잡다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비로소 해가 넘어가고 푸른 어둠이 하늘을 차지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얼굴은 웃음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하늘을 닮아가고 싶었다. 




첫번째 겨울 



몇 개월이 흐르고 자잘한 일로 할아버지와 상의를 하면서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그의 토지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나의 오두막을 향해 기울어진 거대한 나무를 한 그루 베어야 했고, 오두막 외벽을 뒤덮은 담쟁이 덩쿨을 제거해야 했다. 그는 번거로울 수 있는 크고 작은 요청에 호의적이었다. 

"나는 발명가야."

어느 날, 발명가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발명가요? 무엇을 발명하나요?"

태어나서 지금껏 자신을 발명가라고 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나는 무척 신기해하며 물었다. 

"지금은 태양열을 이용한 발명을 해. 요즘은 태양열로만 요리를 해서 식사하지. 지난 주에 뉴욕에 가서 대체에너지에 대한 강연을 했어."

이제서야 그의 집과 뒷마당, 창고에 널려있는 수많은 물건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하루종일 느린 걸음으로 집 안팎을 배회하며 무언가 열중해 있는 그는 발명가의 고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한 걸음 떨어져 고독한 일상을 택한 사람들만이 갖는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펜스라고 해봤자 가림막 효과 없이 뻥 뚫려 있는 형태여서 이웃집이 훤히 드러나 있는 까닭에 서로의 일상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밖에 세워진 차가 없어졌는지, 찾아온 손님이 있는지, 마당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저녁 무렵 어느 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 빤히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역시 나처럼 대부분의 시간 혼자였으나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솟아나는 기운같은 게 있었다. 

각자 마당에서 무언가를 하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손을 들어 천천히 흔드는 것이 전부였다. 

더이상 친해지지도, 다가와 말을 걸거나 서로에 대해 묻지 않는 채,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다. 




문득 돌이켜보니 그의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다락방의 창문은 깨져 있고 페인트가 다 벗겨진 낡은 집과 오래된 트럭에 어울리지 않는 매끈한 소형 테슬라 자동차 (외출용 자동차), 마당에 서식하는 다섯 마리의 고양이와의 동거, 수백 번은 세탁한 듯 구멍 뚫린 티셔츠와 작업복 바지, 모자의 오묘하게 비슷한 색감, 쓰레기 창고처럼 너저분한 물건들이 주는 어떠한 조화로움이 있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중한 채, 주위 작은 생명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인간은 오직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만 자유롭다. 
당장의 만족감을 얻으려는 동기로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우리는 게속 끌려다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생산성이나 열중도가 아무리 높아도, 어떠한 큰 인정을 받더라도 무가치함의 트랜스를 타계할 수 없으며, “내면 깊은 곳의 자기”와 만날 수 없다. 로렌스가 지적한 것처럼, 내면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뛰어드는 것”이다. 우리 가슴의 열망을 듣고 반응하기 위해서는 헌신적이고 진정한 깨어있음이 필요하다. 대체물을 쫒아가는 껍데기 세계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뛰어드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 타라 브랙 ‘받아들임’ 중에서 - 





삶의 큰 변화를 겪으며 자기 연민과 후회, 불확실성 앞의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했던 나에게 그의 존재는 분명히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내면 깊은 곳의 진짜 나를 만나 비로소 "뛰어드는 용기"를 키워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틀림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리 하찮은 곳에도 작고 큰 삶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듯이 우선 해야할 일은 마음을 열고 지혜와 자비의 빛이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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