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마 초드론이 말하는 중도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도 괜찮겠어?"
솔직한 나의 물음에 언젠가 누군가 말했다.
"당연하지. 재미 담당은 나 하나로 충분해."
사람은 이렇게나 다르다.
상대를 웃기는데 행복을 느끼는 사람과 재미 없어서 미안한 사람의 다행스러운 만남.
나는 새 관찰을 좋아한다. 사계절 내내 마당의 나무에 걸어놓은 새모이를 가득 채워놓고 기다린다.
일상 생활 중에 문득 문득 창문 너머 보이는 새들이 모이를 먹으러 온 모습은 큰 즐거움이다.
계절에 따라, 그리고 시간대에 따라 오는 새들이 다르다.
그들과 나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소통하고 있다, 공존하고 있다.
여름 철엔 허밍버드(벌새)를 기다린다. 강렬한 빨강색으로 만들어진 벌새의 먹이그릇은 달콤한 넥타와 희석한 물을 담아둔다. 손가락만큼 작은 몸집에 길고 뾰족한 부리를 가진 벌새가 찾아온 날은 기분이 그렇게 좋다.
매일 산책가는 공원은 이 지역 자생식물들을 보호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구역이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상태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허리까지 오는 갈대밭 사이로 다양한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갈대밭 중간에 야생 새들의 쉼터가 있다. 덕분에 하루 어떤 시간에 방문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야생의 새들을 볼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나타나는 작은 새들과 다르게 하늘 위엔 언제나 매들이 먹이감을 찾아 낮고 느리게 맴돈다. 끼익-끼익- 우는 거위들은 일렬에서 삼각형 모양으로 행렬을 바꾸며 하늘을 가로지른다.
모두가 '새'라고 불리우지만 이렇게나 다르다.
우리도 '사람'이라고 불리우지만 사실은 새보다 더 다양한 종으로 나뉘어져 있는게 아닐까?
동물을 관찰하며 가장 감탄하는 점은 그들이 본성 그대로, 날 것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생명은 타고난 본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새처럼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지.
어떤 명상 강의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강연자의 친구는 불치병에 걸린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I thought there was something wrong with me for all my life."
"난 평생 나 자신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여겼어."
초등학교 1학년, 수업이 끝나면 각 반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을 인솔하여 교문에서 10여분 떨어져 있는 횡단보도까지 데려다 주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엄마에게 "00이만 나오면 우리반 아이들이 전부 나온 거에요." 라고 말해서 한동안 회자되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느린 아이였다. 행동 자체도 느렸지만 자주 공상에 빠졌고 겁이 많았다.
12월 생이라 반에서도 거의 제일 어린 편이었다.
늦되고 소극적인 내가 엄마없이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반 아이들을 따라가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을 것이다.
동물을 좋아해서 학교 앞 병아리, 메추리, 오리를 파는 아저씨를 지나치지 못했고 추가적으로 거북이, 소라게, 강아지, 고양이까지 데려와 키웠다. 식구 중 아무도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 나는 책 많이 읽는 아이로 통했다. 옆집에 놀러가도 아이들과 놀지 않고 그 집의 책장부터 살폈다. 친구 집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고학년이 되자 친구의 손위 언니,오빠나 부모님 책장도 허락을 받고 탐색했다. 우리 집에 있는 책들은 내가 읽어치우는 속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좋았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혼자서 틀어박혀 책을 읽는 편이 좋았다.
소극적이고 걱정이 많았기에 친구들이 마냥 편하지 않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말 수가 줄었다.
어떻게 대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동물들이 좋았다. 책장에 꽂혀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이 좋았다.
그것은 일종의 허락된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사회생활을 했던 시기까지 나의 정체성, 성격, 보여지는 모습은 계속 변화했다.
누구라도 그렇듯 크고 작은 사건들과 함께한 쓰라리고 빛난 청춘의 성장기였다.
나도 사회화 과정에서 또래 집단과 최대한 비슷해져 보고자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충분치 않고,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한 아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언제나 틀리지 않으려, 실수하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다고 남들을 따르자니 '이건 아닌데' 하는 고집이 있었고, 온전히 나 자신을 드러내기엔 자신감이 부족했다. 대부분 전형적 엘리트로 일탈없는 삶을 지향하는 가족 분위기에 돌연변이인 나는 성장할수록 들어맞지 않는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나이가 들수록 세상 속에 어우러져 사는 게 수월해졌다. 어려서부터 애늙은이라 불렸으니 생물학적 나이가 많아질수록 또래 집단이 편해졌던 것이다. 특히 20대부터는 사회에서 나이가 한참 많은 선배, 상사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며 자신감을 얻었다. 점차 사교적이고 활발해졌으나 이번에는 에고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성장기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고 구깃구깃 밀어넣은 채 사회인이 되었던 것이다. 멀쩡한 겉모습과 달리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대체로 행복하지 않았다.
꽤 성공적인 직장생활이 펼쳐졌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시도때도 없이 시달렸다.
내가 마음 공부에 이토록 끌렸던 것도 내면의 방황과 갈등, 상처가 컸기 때문이리라.
아프지 않은 사람은 굳이 병원을 찾거나 약을 구하러 다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무언가 잘못된 느낌'없이 나 자신으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마흔에 접어든 지금, 먼 길을 돌아 돌아 시골에서의 느린 삶을 선택한 나는 페마 초드론이 말하는 '고요한 외로움'에 더없이 공감하고, 그와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면밀히 들어가면 애초에 '나'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인연따라 세상에 태어난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특성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세어보니 살아온 인생의 절반은 한국, 절반은 다른 나라들을 오가며 살았다. 중간 중간 한국에 정착할 뻔 하다가도 어떤 연유에선지 계속 해외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늘 어디가서 살아도 크게 상관없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여러 나라를 거쳐 다양한 인종과 문화 속에 살다보니 어딜가나 이방인 처지이지만 덕분에 '꼭 이래야만 한다'는 사고에서 유연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명상과 마음 공부를 통해 '무언가 잘못된 느낌'없이 살아가는 법을 찾게 되었고 지금도 더욱 자유로워지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비눗방울을 깃털로 살짝 어루만지듯 오고가는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라.
그것들이 저절로 생겼다가 제풀에 사라지도록 내버려두라.
우리는 이런 명상으로 생의 근원적인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불필요한 저항을 멈추며, 치우친 편견에서 벗어나 중도에 머무르는 존재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외로움이나 지루함, 불안 같은 특정한 감정들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날려버려야 한다는 충동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감정에 여유를 갖지 못하면 중도에 머무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승리 아니면 패배, 칭찬 아니면 비난에 익숙하다.
이런 습관적 인식 안에서 외로움은 적으로 혹은 불청객으로 취급된다.
이때의 외로움은 '지금 이 순간'에서 도피해 나와 함께 하려는 어떤 것 혹은 누군가를 찾고 싶은 생각만으로 꽉 찬 불안정한 상태다. 하지만 마음이 중도에 머무르며 느긋하게 쉴 때는 다르다.
그때 우리는 외로움과 동행하면서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고요하며 너그러운 외로움이다.
고요한 외로움은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되 쓸데없이 공격하지 않는다.
고요한 외로움 속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보였으면 좋겠다' '꼭 그렇게 되어야겠다'와 같은 이상을 포기한다.
고요한 외로움은 그럴 필요가 없을만큼 있는 그대로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신 스스로를 유머와 자비를 갖고 직접 들여다본다.
그때의 외로움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으며,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고 우리에게 벌을 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질 때 by 페마 초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