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딛고 섰던 발아래 세상이 유독 낯설다. 항상 같은 힘으로 나를 당기던 중력이 오늘따라 배로 버거워 힘에 부친다. 그래서인지 싸늘한 땀줄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나는 힘겨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애써 평온한 무표정을 가장하여 면상에 지어 보인다. 나는 이윽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거운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지면에 놓기를 반복한다. 두 다리가 지면에 닿을 때마다 그대로 주저앉아 바닥에 몸의 무게를 오롯이 떠넘기고 싶은 유혹적인 충동이 끈적하게 눌어붙었으나 이내 그 충동을 단호하게 탁 털어버리고 계속 걸어 나간다.
문 앞에 거의 다다랐다. 평소보다 더욱 육중하고 거대해진 듯한 그 자태를 반쯤 풀린 눈으로 멍하니 주시한다.
저 문만 열면 밖이다.
그렇게 되뇌이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손끝은 문손잡이에 가 닿는 대신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이 홱, 반 바퀴 돌아간다. 잠시나마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혹여 이 찰나도 비행으로 쳐주려나, 하는 엉뚱한 상상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리 오래 뻗어나가지 못하고 허망히 추락했다.
곧이어, 텅- 하는 소리가 왼 귀에 아플 정도로 울린다. 어째서인지 차갑고 단단한 바닥이 내 머리를 받들고 있다. 짧은 비명의 뒤를 이명이 뒤따르더니 이내 완전히 따라잡아 덮어버린다. 내 귀를 틀어막은 이명 탓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눈을 떠보았지만, 사방이 노이즈가 낀듯하여 더욱 어지러울 뿐이었다. 눈도 가려졌다. 귀도 막혔다. 오감 중 촉각과 후각, 미각만이 간신히 살아있다. 두 감각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만큼 다른 감각이 더욱 극대화된다. 그러나 그 감각들을 통해 나의 의식 속으로 흘러드는 것은 차가운 바닥에서 왼 얼굴로 서서히 타고 올라오는 냉기와, 내 얼굴을 반쯤 덮은 머리칼에서 풍기는 익숙한 샴푸 냄새, 입안을 감도는 씁쓸한 맛뿐. 나는 감각의 반경을 더 넓히기 위해 애를 써본다.
그때, 누군가 꿈결처럼, 어렴풋이 나를 흔든다. 나를 일으켜보려 애쓰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 노력을 인지했음에도 다시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몸의 무게를 사방에서 받들어주는 바닥이겨울의 이부자리처럼 차갑지만 아늑하게 느껴져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눈앞의 풍경은 알 수 없다. 그 덕분에 내게 일제히 쏠렸을 50개가량의 눈빛을 마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눈빛이 동정이든, 놀람이든, 호기심이든지 간에 내게는 그저 화살처럼 나를 꿰뚫고 지나가는 시선일 뿐이었으므로.
끊이지 않을 듯 길게 늘어지던 이명이 이제 서서히 끝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명으로 채워졌던 공간 너머의 소리가 이제야 들린다. 웅성거리는 무질서한 소음에서 당황스러움과 놀람,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도 묻어나는 듯하다.
그렇지, 놀랐겠지. 혼란스럽겠지.
나는 그들의 우왕좌왕을 멈추어주기 위해 씁쓸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싸늘한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분명 상체를 위로 일으켜 세웠음에도 어째 아래로 자꾸만 기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나를 도와 벽에 기대앉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방금 전 나를 깨우려던 손과 같은 손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마운 손이다. 손의 주인에게 직접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나를 잡아끄는 힘에 애써 저항해 가며 걸음을 옮긴 그때부터 이미 입 밖으로 단어 하나 뱉어낼 기운까지 다 소진해 버렸다. 그냥 다시 누워버릴까 하는 달콤한 유혹이 머리를 스치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는 태어나 처음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심호흡을 한다. 나의 폐를 드나드는 숨. 호기와 흡기에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걸음마를 다시 배우는 아이처럼, 나는 다시 세상을 두 다리로 딛는다. 열일곱 소녀의 몸뚱이는 걸음마를 떼기에는 버거운 무게다. 이번에도 ‘고마운 손’의 도움덕에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일어난다. 내 인생 두 번째로 걸음마를 뗀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첫 번째의 그것처럼 기쁘냐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지금의 감정 상태가 불분명할뿐더러, 솔직히 첫 번째 걸음마의 순간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첫 번째 걸음마를 뗄 때에는 나를 위해 기뻐해준 사람들이 있었겠지. 그렇다면 지금은?
... 자꾸 엉뚱한 생각으로 빠진다. 여전히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이 일그러져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지금 나의 시야가 이상한 것인지, 원체 세상이 이리 왜곡되어 있었는데 그동안 간과하고 살아왔던 것인지 헷갈린다. 아마 쓰러지면서 머리를 좀 다쳤나 보다... 그 생각을 끝으로, 다리의 힘이 다시 서서히 풀린다. 벽을 타고 미끄러지려다가, 마침 도착한휠체어 쪽으로 허위허위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다.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휠체어를 밀며 문 밖으로 나간다. 거대한 두 바퀴가 속도감 있게 굴러간다.
서고 걷는 것. 그동안 당연하게 해 오던 행동이었다. 적어도 그 방면에서는 숙달된 전문가이던 나였다. 그러나 이제두 다리로 서는 것조차, 걷는 것조차 실패해 버린나는 균형이 맞지 않는 삐딱한 자세로 앉은 채 어디론가 끌려가며 꽤나 건방지게 허공을 응시한다. 어렵게 되찾은 이명 없는 귀와 왜곡 없는 눈으로.
그러나 그렇게 상황을 파악해 가는 것도 잠시.
다시금 흐릿하게멀어져 가는 정신에, 나는 간신히 붙들고 있었던일말의 판단력마저 이내 스르륵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