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
획을 마음대로 꺾고 글씨를 흘릴 수 있는 만년필을 좋아한다
의무적이고 딱딱한 박수보다 조용하고 차분한 공감을 좋아한다
얼굴을 두껍게 가리는 진한 화장보다 수수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새 책을 구입해두곤 그것의 표지를 열어볼 특별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
요리를 먹는 시간보다 음식이 손질되고 끓고 볶아지며 냄새가 변해가는 때를 더 좋아한다
다양한 빛깔로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는 금속 뱃지들을 모으길 좋아한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작고 여린 생명체들을 좋아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종일 코 위에 얹혀있던 안경을 내려놓고
흐린 시야로 졸음을 만끽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시간을 나의 언어로 새겨둔 헌 일기장들을 좋아한다
미용실에 가는 날보다 자른 머리칼을 다시 길러내는 시기를 좋아한다
내 검은 실수의 흔적을 하얗게 깨끗한 초심으로 덮어주는 수정테이프를 좋아한다
오랜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나의 글씨체를 좋아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여백을 좋아한다
책을 읽다가 자리를 비울 때, 내가 읽은 문장을 잊지 않도록 지키고 서서
내가 다시 돌아오길 묵묵히 기다려주는 책갈피를 좋아한다
열정적인 붉음과 일렁이는 푸름이 뒤섞여 태어난 보랏빛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라는 말이 가진 울림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시간, 1학년 때도 우리의 수업을 맡으셨던 익숙한 얼굴의 국어 선생님께서 걸어들어오셨고, 이 시가 적힌 학습지를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그리고 뒷면에는 하얗게 텅 빈 공간이 펼쳐져있었다. 마치 우리가 그 공간을 채워주길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아니나 다를까, 앞장의 시를 다 함께 읽고난 뒤, 선생님께서는
"뒷장을 너희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보렴."
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런데 다른 반에 가서 이 수업을 해보니까 애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그건 좀 슬프지 않니?"
혼잣말같은 질문을 말꼬리에 덧붙이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좀전까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빈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찬찬히 고개를 들어 주변 친구들을 살며시 돌아보았다. 과연, 선생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연필을 손에 걸치듯이 쥐곤 고개를 숙인 채 곰곰히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매번 '진로를 빨리 정해야 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따위의 말만 듣고 살아온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정작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천천히 고민해볼 시간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던걸까. 갈곳을 잃은 채 허공에 멈춰선 수많은 펜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종이 위로 곧바로 향하는 대신 우뚝 서있는 내 펜 끝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기분이 더욱 가라앉아 슬퍼져버리기 전에 나는 재빨리 종이 위에 펜을 댔다.
그러나 곧 다시 떼어냈다.
또 다시 종이에 맞대었다가 떼길 반복했다.
나는 결국 하릴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빈 종이를 노려보는 그들의 일부로 녹아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고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은연중에 내 가장 가까이에 스며들어 있겠지.'
마음을 느긋하게 고쳐먹고 나니 내 머릿속을 스치는 그 생각에, 나는 잡다한 것들이 가득 든 내 뚱뚱한 가방 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온갖 필기구와 기타 물건들로 채워진 커다란 필통도. 내가 가장 오랜 시간 바라보고, 사용하고, 만지는 것들. 그것들로부터 나는 스스로의 흔적을 되짚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펜을 고쳐잡고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할 수 있었다. 나의 말들로 여백을 색칠해갔다. 나만의 '선택의 가능성'들이 줄맞춰 나열된다. 첫 단어를 쓰기 시작하니 그 뒤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종이가 꽉 채워질 무렵, 슬슬 글을 마치려고 하던 나는 내 글을 다시 훑어보다가 문득 말끝마다 붙은 '좋아한다' 는 말에 눈길이 갔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 놓으려던 펜을 다시 집어들어 맨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좋아한다'라는 말이 가진 울림을 좋아한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저 이 글이 이렇게 완성되었다는 말을 하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