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ong blue Dec 13. 2023

좀비같은 우정

  서린이가 한창 인기몰이 중인 좀비 영화를 봤느냐고 물었다.

  “아니.”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빨리 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겁이 무척 많았다. 집 뒤란에서 나는 댓잎 소리, 바람에 펄럭거리는 빨래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른들이 돌아가시거나 귀신 이야기라도 듣는 날엔 무서워서 이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피를 질질 흘리고 더럽고 혐오스러운데다 끝도 없이 아득바득 물어뜯는 좀비 영화를 보라니.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좀비라는 괴물을 만든 사람은 천재임이 틀림없다. 십 년 넘게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쓰이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괴이한 좀비 영화에 열광하는 걸까? 현실이 영화보다 더 좀비 같아서일까?

  현무는 수학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아이다. 나도 어려워하는 문제를 순식간에 풀었다. 공룡이나 유니트 같은 종이접기 도해를 금방 알아내고 척척 접을 줄 알았다. 점심시간에는 식판에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고 편식도 하지 않았다. 옷매무새나 머리카락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항상 단정하고 꼿꼿했다.

  하지만 이토록 완벽한 현무에게는 큰 단점이 있었다. 자기 욕구가 너무 강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어울리더라도 다툼을 일삼았다.  

  이와달리 온유는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그림을 잘 그리고 이야기도 잘 지었다. 하지만 고집이 너무 세서 아이들과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둘은 이처럼 다른 듯하면서 비슷한 점을 갖고 있었는데 희한하게 색다른 방식으로 소통했다. 둘은 언제 봤냐는 듯 쌩하니 고개를 돌리다가도 무슨 꼬투리만 생기면 눈에 불을 켜고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현무: 나 게임레벨 올랐다?

 온유: 그래서?

 현무: 뭐가 그래서야? 레벨 올랐다고.

 온유: 안물

 현무: 빡쳐!

 온유: 안궁

 현무: 개박살!

 온유: 개개박살!     

 

  이 정도는 일상이었다. 이 둘은 누가 지켜보든 말든 한 번 꽂히면 멈추지 않았다. 의미 없는 말싸움을 계속 할 때마다 화도 내보고 달래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머리 좋고 재능이 뛰어난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매너였다. 하지만 그건 가르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몸에 배는 게 아니었다.

  이 두 녀석은 어느 한쪽의 독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최대치로 깎아내리고 조롱하는 데 핏대를 세우고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러다가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의 주위를 배회했다. 미워하면서도 서로를 찾는 묘한 심리, 알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했다.  

  당연히 이 아이들과 모둠이 되기를 모두가 꺼려했다. 공동체 생활에서 타협과 양보가 기본인데 자기주장만 내세우니 좋아할 리 없었다. 아이들의 불만도 없어야 하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힘들어하는 일도 없어야 해서 모둠을 바꾸는 날이면 골머리가 아팠다.

  줄기차게 내리던 장맛비가 그친 어느 날이었다. 공부 시간이 되었는데 온유가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현무랑 싸워서 복도에 있다고 했다. 스스로 들어오기는 글른 성싶어 직접 복도로 데리러 갔다. 아니나 다를까. 온유는 전봇대처럼 서서 복도 바닥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일단 들어오고 쉬는 시간에 얘기하자.”

  달래고 얼러도 끄떡하지 않았다. 사정해도 통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그냥 두고 수업을 하러 교실로 들어갔다. 온유가 복도에 서 있으니 신경이 쓰여 수업을 매끄럽게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온유는 한 시간이 지나 스스로 화를 풀고 나서야 교실로 들어왔다. 누가 먼저 원인을 제공했는지 물어도 둘 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했다. 억지로 사과를 받아내는 일도 무의미해서 부모에게만 알렸다.  

  다음 날 아침 온유가 내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제는 죄송했다며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허리를 구십도로 숙였다.  

  “제발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 현무야 특별히 부탁해.”

  “선생님이 안 무섭게 하니까 그러잖아요?”

  “뭐어?”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초임교사 때 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무섭게 다그치기만 했다. 선배들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깨달았다. 당장은 통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을 수동적이고 방어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그래서 재미없는 선생님이 될지언정 무서운 선생님은 되지 말자고 결심했다.

  동화를 쓰는 사람은 글과 말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사소한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 한 아이도 외로운 아이가 생겨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사람, 그러기에 그냥 교사보다 동화작가이면서 교사는 몇 배 더 어렵고 힘들다.  

 “현무야, 그럼 내가 무섭게 하면 안 그럴 거야?”

 “예.”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때 화를 내면 못난 어른이란 소리를 듣는다. 잘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혼자 잘해보려다 엎어진 꼴이 된다. 쪽팔림을 감수하고서라도 못난 어른이 되기로 했다.

 “현무 부모님은 현무를 무섭게 대하는 모양이구나? 그래서 말을 잘 듣는 거야?”   “네?”

  현무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현무 어머니와의 몇 번에 걸친 통화를 통해 나는 현무가 학교에서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무는 자상한 아빠와 엄마, 현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누나들 틈에 자랐다.

  현무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현무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듯싶었다.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사회 시간에 토론을 하고 있는 데 교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업 중에 전화하는 일이 드물어서 아주 급한 일인가보다 하고 받았다. 어차피 수업의 흐름은 끊어졌고 받지 않으면 계속 울릴 것 같았다.  

 “여보세요? 저 현무 엄만데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현무가 방과후학교 신청을 하려는데 번호를 몰라서 전화했단다. 번호를 알려주고 나서 그런 일이라면 메시지를 이용하면 좋겠다고 했다. 내 충고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전화를 툭 끊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안 지나 현무 엄마가 교감을 만나러 왔다. 담임이 불친절하게 전화를 받아서 기분이 나쁘다며 사과받으러 왔단다. 당시 나는 수업 분위기를 망친 데다 그런 일이 한두 번 아니라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니 응대하는 목소리가 기대처럼 친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매너를 지키지 않은 사람이 누굴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상대를 비방하는 현무 엄마야말로 비상식적인 사람 아닐까? 나중에 현무 어머니를 만나 대화한 끝에 오해를 풀기는 했다. 하지만 상처가 컸다. 계속 교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 선생님은 뭐하셨어요?”

  “아동학대로 신고해도 될까요?”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교장실에 가려다 선생님께 먼저 전화드린 거예요.”


  가끔 감정적인 말로 상처를 주는 학부모들이 있다. 교사도 사람이라 시행착오도 있고 실수도 할 수 있다. 그럴수록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아동학대로 신고당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는 교사가 95%나 된다는 설문 결과를 봤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혼내 우리 아이가 위축되었다, 구구단을 못 외운다고 남겨 공부시키는 것은 정서 학대다, 발표를 자꾸 시켜 선택적 함묵증이 생겼다 등이 신고 이유였다. 무분별한 신고로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은 아이들이다. 교육활동이 위축돼 학습권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가가초등학교에서는 매년 11월이 되면 학년별 피구대회가 열린다. 경쟁을 통해 협동심도 기르고 반 아이들끼리 결속력을 다지자는 취지다. 대회인지라 승리하는 반에는 우승컵이 주어진다.  

  초등학교라고 해서 절대 규칙이 느슨하지 않다. 머리를 맞히면 아웃이 아니고, 잘하는 아이만 집중해서 공격할 수도 없고, 상대팀에게 욕이나 과한 행동을 하면 감점이다. 이와 같은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는 탈락으로 간주한다.

  현무와 온유는 각각 다른 팀이었는데 공교롭게 둘 다 끝까지 살아남았다. 숨 막히는 접전이 이어진 끝에 온유가 던진 공이 현무 다리를 맞혔다. 승리한 온유 팀은 좋아서 서로를 끌어안고 뛰었다. 아쉽게 패한 현무 팀은 시무룩했다.

  이어 다음 경기를 할 차례였다. 그때까지도 현무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운동장 한구석으로 뛰어갔다.

  현무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경기를 이어갔다. 갑자기 현무가 소리를 지르며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끼약!”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제지할 틈도 없이 현무가 온유에게 돌팔매질을 한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비켜나갔기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 만약 눈이라도 맞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 일이 있은 뒤 무조건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부욕이 강한 아이를 경쟁 상대로 만들기보다는 협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수학 시간에 학교 안에서 볼 수 있는 도형을 같이 찾아보게 한다거나 미술 시간에 둘이 협동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때 결과물보다는 두 사람이 서로 도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은 늘 장난을 치면서 자란다. 가벼운 농담이나 몸싸움은 웃음을 준다. 그러나 장난이 심하면 늘 끝이 좀비처럼 피투성이가 된다. 장난은 놀이와 달리 규칙이 없다.

  피구는 규칙이 있는 놀이다. 아웅다웅 놀리고 도망가고 소리 지르더라도 죽으면 끝이다. 좀비처럼 살아나 공 대신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운동 경기에서 규칙을 위반하면 경고가 날아오고 심하면 퇴장이다. 심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칠게 항의하면 감독은 벤치 신세로 밀려나고 아예 다음 경기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된다.

  키케로의 <우정론>에 보면 “우정은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고 했다. 나는 “우정은 선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하다”로 바꿔본다. 티키타카 하면서 가볍게 선을 밟을 수는 있다. 아이들이니까 금방 돌아오면 그만이다. 그러나 막무가내 선을 넘어서 좀비처럼 물어뜯는다면 우정이 이어질 리 없다.      


     


  

  선생님, 저 현무예요.

  저는 집에서는 욕을 하지 않아요. 저를 화나게 하거나 약 올리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할머니는 누나만 둘일 때 우리 집 대가 끊긴다며 난리를 쳤어요. 셋째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새벽 기도를 천 일이나 다녔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우리 집 왕자가 되었어요. 제가 왕자라면 누나들은 공주님인데 어쩐 일인지 우리 집에서는 다들 하인 같았어요. 제가 왕자라면 엄마 아빠는 왕비와 왕일 텐데 마찬가지로 하인들 같았고요. 왕자님만의 나라를 조종한 건 할머니였어요.

 “내버려 둬라.”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무엇이든 맘대로 할 수 있었어요. 먹는 것도 노는 것도 맘대로요.

  그런데 학교는 안 그래요. 아무 때나 할리갈리를 하지도 못하고 간식도 가져오면 안 되고 우유를 마실 때나 밥 먹으러 갈 때도 순서를 지켜야 해요. 배고플 때 맨 꼴찌로 줄을 서게 되면 얼마나 짜증이 나는 줄 알아요? 앞으로 살짝 끼어들기라도 하면 애들이 새치기하지 말라고 난리를 쳐요.

  선생님이 밥 먹는 순서를 정할 때 번호대로 하지 않고 뭘 잘해야 먼저 먹게 해서 짜증 났어요. 모둠을 잘 만난 애들은 좋지만 저처럼 아닌 애들은 맨날 늦게 먹게 되잖아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식어버리면 맛이 없거든요. 저 때문에 늦게 먹는다고 모둠 애들이 뭐라 할 때마다 성질이 나요. 그래도 막상 식판을 받고 나면 기분이 좋아서 싹싹 긁어 먹게 돼요. 그런 저를 보고 선생님이 편식하지 않는다고 칭찬하셨어요.  

  체험학습 때나 운동회 때 저는 항상 혼자예요. 저랑 짝을 하려는 애들이 없기 때문이에요. 같이 다니려면 상대방에게 맞춰야 한다는데 전 그러기 싫어요.

  1학년 때는 선생님이랑 같이 다녔어요. 혼자 다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혼자 다니면 창피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해요. 저도 애들처럼 밥 먹을 때까지 앉아서 기다려 주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는데,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없어요.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온유하고 친해지려고 말을 걸면 그때마다 시비 건다고 하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어요. 제가 고운 말을 쓰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는데 그건 온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온유하고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요. 역할 분담으로 둘이서 우유 당번을 한 적 있어요. 손이 아프다는 핑계로 나한테는 무거운 우유곽을 들게 하고 자기는 다 마신 빈 우유곽만 들었어요.  

  그뿐 아니에요. 다른 애들한테는 그림을 잘 그려주면서 나한테는 주지 않았어요. 종이접기 할 때 나만 쏙 빼놓고 알려주지 않았고요. 그래서 제가 신발을 감춰버렸는데 온유가 알고 애들한테 소문냈어요. 물론 장난쳐서 미안하다고 했죠. 그런데 온유는 풀어지지 않았어요. 저를 볼 때마다 째려보고 입을 씰룩거렸어요.  

  온유랑 많이 싸우니까 선생님이 우리 엄마한테 복도에 와서 지키고 있으라고 했어요. 실제로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2학년이 되어서 선생님은 우리 둘을 뚝 떼어놓았어요. 그래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3학년 첫날, 반에 들어서는 온유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어요.

  피구할 때 온유가 나 먼저 죽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해요. 온유랑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반갑다고 했잖아요. 둘 남은 중에 설마 나에게 공을 던질지는 생각 못했어요. 당연히 다른 애한테 공이 가겠지 하고 방심한 틈을 노려 머리에 딱 맞춘 거예요. 그건 공이 아니라 핵폭탄이었어요. 나는 공격에는 공격으로 응수할 생각이었어요. 돌멩이가 눈에 보여서 나를 죽인 원한을 꽁꽁 뭉쳐서 날려 보냈죠.

  지금 생각하면 그 돌이 빗나간 게 천만다행이에요. 제대로 맞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엄마가 복도에 서 있는 정도가 아니었겠죠. 할머니를 비롯해 온 식구가 제 대신 벌을 받고 운동장에서 불쌍하게 서 있었겠죠. 그 생각을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온유한테 화가 풀리지는 않아요. 선생님이 놀이 규칙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주셔서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왜 풀리지 않는지 생각을 더 많이 해볼게요.     

작가의 이전글 너에게만 보여주는 미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