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특수교사가 됐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남동생이 발달장애가 있다고 하면 모두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특수교사가 되셨군요! 남다른 사명감이 있으실 것 같네요."
그럴 때마다 매우 머쓱해진다. 물론 동생 덕분에 당시 입시에서 흔치 않았던 특수교육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맞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수능을 망치기 전까진) 내가 희망했던 곳은 교육대학교(교대)였다.
사실 다니던 고등학교에 특수학급이 있었음에도 특수학급 친구들을 일부러 더 외면하고 다녔다. 동생이 장애인이면 더 유심히 보지 않을까 하는 통념이 있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중증자페성장애에 텐트럼이 매우 심했던 동생으로 인해, 그리고 스티븐존슨증후군 후유증으로 인해 유년시절이 너무나 힘겹던 나는 심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내 몸도 힘들어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었는데 동생으로 인해 집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늘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동생을 받아들이기에 내가 너무 어렸고 철도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당연히 특수교육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집보다 학교가 좋았던 나는 어른이 돼서도 학교에 다니기 위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중등교사 임용시험의 문턱이 너무나 높던 2000년대 초반, 그나마 수월한 초등교사 임용시험 이야기를 듣고 교대를 지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IMF이후 우상향하던 교대 수능점수 컷트라인은 내가 대입을 치루던 06년도 수능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고3 내내 유리멘탈이었던 나는 모의고사 점수가 롤러코스터를 탔는데 수능 날 바닥을 찍었다. 열심히 정시 논술도 준비했지만 '예비 140번'이라는, 사실상 '불합격'이나 마찬가지인 교대 입시결과였다.
당시 정시 입시에서 교대는 모두 나군에 몰려 있었으므로 가군과 다군에는 교대 이외에 다른 대학을 써야 했다. 교대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냥 재수까지 할 생각이었기에 알고 있는 학과 아무 곳이나 썼는데, 그게 가군에서는 K대학 특수교육과였다. 그리고 얼떨결에 합격을 했다.
부모님은 재수한다는 나를 극구 말리셨다. 재수는 정말 공부를 잘해서 안정적으로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오던 학생이 수능때 약간 실수해서 너무 아까운 경우에 하는 거라고. 나같이 점수도 오르락내리락 불안하고 멘탈도 약한 학생이 하는 게 아니라고. 재수하면 결과는 더 좋지 않을 거라며 반대하셨다. 그리고 특수학교 학부모였던 우리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특수교사도 정말 좋은 직업이야. 우리 아들 특수학교 보내면서 얼마나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는지 몰라. 장애학생들이야말로 학교교육이 꼭 필요한 학생들이야. 앞으로 장애학생 수도, 필요한 특수교사 수도 점점 늘어날 거야. 오히려 초등학생 수는 줄어도 특수교육대상학생은 늘어날거다. 이왕 선생님이 될 거면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선생님이 되면 좋겠어. 물론 만만치 않은 일이겠지만 그건 모든 선생님들이, 아니 모든 직업인들이 다 마찬가지란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부모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셨다.
실제로 지금 교육현장을 보면 그렇다. 전체 학생수는 급감하는 추세이지만 특수교육대상학생은 줄지 않아 특수교육대상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아졌다. 과밀된 특수학급의 현실이 교육 현장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으며 턱없이 부족한 특수교사수를 늘리고 특수학급 법정 인원을 지키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처음부터 특수교육과를 지망한 것이 아니었기에 과연 이게 맞는걸까 고민했다. 게다가 K대학은 우리 집에서 100km도 넘게 떨어진 지역에 있었으므로 기숙사생활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기숙사 생활도 즐거웠고, 대학 동기들도 너무 좋았다. 대학생활이 행복했다. 게다가 학과공부도 의외로 잘 맞았고, 공부를 하면서 나 스스로 '장애인식개선교육'이 되면서 남동생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남동생의 장애를 숨기며 부정하고 싶어했구나 깨달았다. 특수교육 공부를 하며 유년시절 곪고 곪았던 내 마음이 오히려 치유가 됐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동생의 대해 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동생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동생의 존재조차도 외면해버렸다. 하지만 특수교육과에 진학한 후에는 동생의 장애를 숨기지 않고 오픈했다. 예전에는 내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수근댈 줄 알았다. 내 동생이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며 걸어갈 때 주변에서 손가락질하고 혐오하던 것처럼 나한테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도 안되는 나의 망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대학생이 된 후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처음으로 남동생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입을 모아 한 말이 참 뜻밖이었다.
"우리 어릴 때부터 다 알고 있었어. 네 남동생이 장애가 있다는거 말야. 먼저 말 안하길래 우리도 말 안했는데..."
.........나는 왜 유년시절 기를 쓰고 남동생을 숨기고 싶어했을까.
나 빼고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내 남동생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나의 교우관계에 전혀 지장이 없었구나. 내가 진작에 남동생에 대해 오픈했더라도 달라질 게 없었겠구나.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다 한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내 남동생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매일 특수학교 하교 버스에서 내린 동생은 슈퍼에서 월드콘을 사서, 특유의 괴성을 내며 집 앞 놀이터를 가로질러 가야 하는 고집스러운 루틴이 있었다. 덕분에 동네 초등학생들에게 '월드콘 형'으로 유명했던 남동생이었다....;;
대학생활을 즐겁게 하고 워낙 성실한 탓에 공부도 열심히 했다. 수능 공부와 다르게 특수교육학과 교육학은 성실하게 많은 양을, 오랜 시간 읽고, 외우고, 쓰는 나의 곰 같은 공부 스타일과 찰떡이었다. 틈틈히 특수학교 교육봉사활동도 다녔다. 이론과 실전에서 경험을 쌓으며 예비특수교사로 지내며 행복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특수교육과에 입학한 첫 해에, 혹시 내가 교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재수한다고 할까봐 고등학교 교과서를 버리지 못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생활이 너무 즐거운 바람에.. 새내기 티를 채 벗기도 전에 교대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버렸다. 몇 년 후 2010학년도 중등 특수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나는 스물네살에 중학교 특수학급 담임이 됐다.
특수교사가 됐다고 해서 남다른 사명감이나 이타성이 있돈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저 특수교육이란 분야를 남들보다 먼저 알았을 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특수교사다워서 특수교사가 된 게 아니라, 특수교사를 하면서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갖춰가는 중이다. 특수교사로 일하다 보니 특수학급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애정이 생겨서, 그들의 현재에 도움이 되고 싶어 부족하지만 역량을 키워나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특수교사라고 하면 뭔가 열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바라봐 주신다. 음.. 그럴 때 많이 부끄럽지만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기 위해... 오늘도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점점 나아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