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퇴근길, 두 발로 꾹꾹 눌러 담는 하루의 마침표

by 아마토르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 소심한 일탈

퇴근 시간, 회사를 빠져나오면 습관처럼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춰본 적이 있으신가요? 찬 바람이 쌩 부는 겨울 저녁, "어휴 춥다"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회사 다닐 때 저는 가끔 버스 정류장을 보란 듯이 지나치곤 했습니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뒤로한 채, 밤거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습니다.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던 소심한 직장인의 엉뚱한 일탈이었죠.

"나는 오늘 버스의 흔들림에 맞춰 춤추지 않겠다."

이런 일탈이 하루의 끝을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바꾼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추웠습니다. 귀는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코끝은 금세 빨개졌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 하루 종일 탁한 사무실 공기에 찌들었던 머릿속이 "뻥" 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걸음마다 하루의 찌꺼기를 털어내다

우리는 퇴근할 때 몸만 집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상사의 신경질적인 말투, 동료와의 미묘한 신경전, 해결되지 않은 업무에 대한 걱정 같은 끈적끈적한 감정 찌꺼기들을 옷자락에 매달고 퇴근합니다. 그 상태로 바로 집에 가서 소파에 누우면 어떻게 될까요? 찌꺼기들이 고스란히 집 안 곳곳에 묻어나, 가장 편안해야 할 안식처마저 오염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필요한 게 있습니다. '에어 샤워'.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기 전 먼지를 털어내듯,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거죠. 도보 퇴근길이 에어 샤워 룸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상상해 보는 겁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을 땅에 꾹꾹 눌러보세요.

'오늘 짜증은 여기에 버린다.'

발바닥이 지면을 밀어내는 반동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던 스트레스가 땅으로 흘러내려간다고 상상해 보세요. 30분 정도 걷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겁니다.


겨울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무언의 위로

돌이켜보면 그 시절 겨울밤의 거리는 유난히 서정적이었습니다. 잎을 다 떨군 가로수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번지고, 사람들은 추위를 피하려 옷깃을 잔뜩 여미고 종종걸음을 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걷다 보면 낯선 타인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푸드 트럭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 무거운 짐을 들고 귀가하는 어느 댁 가장의 뒷모습.

모두 저마다의 하루를 치열하게 버티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겠지요. 차가운 공기 속에 섞인 군고구마 냄새나 붕어빵의 달콤한 향기는 "오늘도 고생했다"라고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만원 버스 안에서는 타인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장애물이었다면, 밤거리 위에서 만나는 타인은 함께 겨울을 나는 동료로 보였습니다. 느슨한 연대감이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은 녹여주었습니다.


나의 속도를 되찾는 시간

오늘도 종일 우리는 타인의 속도에 맞춰 살았습니다. 회사의 마감 기한, 상사의 호출, 알람 소리... 내 리듬이 아닌 외부의 리듬에 끌려다니느라 숨이 찼을 겁니다.

하지만 퇴근길, 혼자 걷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빨리 걸어도 되고, 천천히 걸어도 됩니다. 가다가 잠깐 멈춰 서도 되고, 밤하늘에 뜬 달을 보려고 고개를 젖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내 다리 길이만큼, 내 심장이 뛰는 속도만큼 걷는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행위입니다.

'그래, 나는 이 속도로 걷는 사람이었어.'

발바닥의 리듬을 느끼며 걷다 보면 헝클어졌던 호흡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한 정거장 쿨다운

Gemini 생성

매일 걸어서 퇴근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고요?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일주일에 딱 한 번, 혹은 유난히 스트레스가 심한 날, '한 정거장 미리 내리기'를 실천해 보세요.

집 바로 앞 정류장이 아니라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15분에서 20분 정도만 걸어보세요. 이어폰은 잠시 빼두는 것을 추천합니다. 겨울바람 소리, 내 발자국 소리, 도시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온전히 걷기에만 집중해 보세요.

집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볼은 차갑게 얼어 있겠지만 속은 후끈하게 데워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문을 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의 나는 밖에서 다 털어버리고, 온전한 나만 돌아왔다.'


이 마침표가 있어야 저녁은 쉼이 됩니다. 어느 날 저녁, 당신의 발소리가 겨울밤의 거리에 또각또각 울려 퍼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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