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내일의 걱정을 오늘 미리 당겨 쓰지 않는 지혜

아직 오지 않은 청구서에 미리 이자를 낼 필요는 없다

by 아마토르

새벽 4시였습니다.


불을 껐지만 눈은 말동무를 찾듯 허공을 헤맸습니다. 잠이 와야 할 시간에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주중에 제출해야 할 독서 모임 소개글, 주말 조카 결혼식에서 나눌 친척들과의 대화, 무슨 바람인지도 모르게 시작한 챌린지까지.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쉴 새 없이 돌아갔습니다.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마음은 이미 내일 오후 한복판에 가 있었습니다.

'몸은 침대에 있지만 정신은 내일의 전장에서 피를 흘리는 꼴이라니.'


우리는 내일의 걱정을 오늘로 자주 가져옵니다. 짐을 미리 옮겨 두면 내일이 가벼워질 거라 믿는 탓입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걱정은 짐을 옮기는 생산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오늘 쓸 에너지를 미리 태워버리는 소모전입니다.

내일의 문제를 새벽까지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덜컥 나오지는 않습니다. 마음의 근육만 소진될 뿐이죠.


마음의 고리대금, 걱정

돈을 빌릴 때 이자부터 떼는 선이자 방식은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을 겁니다. 아직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비용부터 지불하는 꼴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일상에서 이 비상식적인 일을 반복합니다.

내일이라는 원금은 아직 손에 쥐지도 않았습니다. 내일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걱정이라는 비싼 이자를 미리 지불합니다.

걱정은 마음의 고리대금입니다. 확정되지 않은 불행을 담보로 오늘의 평온을 빌려쓰는 거니까요. 알다시피 이자는 원금을 조금도 줄여주지 못합니다.

오늘 밤을 꼬박 새워 걱정해도 내일의 과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수면 부족과 불안 때문에 내일의 성과만 망치겠죠. 그런데도 청구서가 오기도 전에 이자부터 지불하려고 하는 걸까요?


매일 블로그나 SNS에 남긴 기록들을 살펴봤습니다. 역시나 과거에 적어둔 걱정거리 중 실제로 일어난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설령 일어났더라도 당시 걱정했던 것만큼 치명적이지 않았죠.

대부분의 걱정은 유령과 같습니다. 실체가 없으면서 존재감만으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니끼요. 우리는 실체 없는 유령과 싸우느라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삽니다.


오늘이라는 단단한 바닥

일상의 단단함은 오늘에 발을 붙일 때 생깁니다. 발바닥이 닿아 있는 곳은 언제나 '지금'이어야 합니다. 내일의 걱정에 매몰되는 순간 발은 허공을 맴돌고, 불안은 공중에 뜬 발 사이로 스며듭니다. 중심을 잡으려면 의식적으로 시선을 발밑으로 내려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감각에 집중하려 합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 발가락 끝에 닿는 서늘함, 창밖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같은 것들이요. 감각은 우리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밧줄이 됩니다.


내일 회의가 걱정된다면 지금 할 일은 서류를 뒤적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고르는 편이 더 낫습니다. 내일의 문제는 내일의 내가 해결하도록 내버려 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 친구는 자기 몫의 할 일이 있어야죠. 기억나지 않겠지만 분명 그런 날이 훨씬 많았을 겁니다. 오늘의 나는 오늘의 휴식을 책임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걱정을 멈추는 행위는 포기가 아닙니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영리한 전략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가 전날 밤 잠을 자지 않고 전장에서 칼을 휘두른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내일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둔 채 오늘을 온전히 누리는 배짱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릅니다.


청구서를 기다리는 태도

청구서는 때가 되면 도착합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죠. 하지만 미리 낼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이렇게 말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 청구서는 아직 발행되지 않았다."

발행되지도 않은 청구서를 들고 은행 앞에 줄을 서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은행 문은 아직 닫혀 있으니까요. 나는 집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권리를 누리면 됩니다.


일상은 매일 조금씩 쌓아 올리는 성벽과 같습니다. 벽돌 하나를 놓을 때 내일 쌓을 벽돌을 걱정하면 수평이 맞지 않습니다. 지금 손에 든 벽돌의 무게와 질감에만 온 신경을 쏟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단단하게 채운 일상은 웬만한 내일의 풍파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내일의 날씨를 오늘 바꿀 수 없습니다. 내일 만날 사람의 기분을 오늘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물론 내일의 그 친구도 날씨나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뿐이죠.

내일의 걱정을 당겨 쓰지 않는 지혜는 나 자신을 믿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문제가 닥치더라도 그때의 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죠.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강제로 종료할 때가 됐습니다. 오지 않은 내일을 오늘의 저당 잡히지 않기로 해야겠죠. 청구서는 우편함에서 확인하면 그만이니까요.

걱정이 있건 없건 우리는 내일을 맞이할 자격을 얻습니다. 걱정의 이자를 지불하는 대신, 오늘이라는 자본을 차곡차곡 저축해 보기로 합니다. 내일의 문이 열릴 때, 나는 풍요롭고 단단한 상태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갈 테니까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의 몫으로 남겨두고 나는 오늘을 삽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amandagrap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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