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업계가 한 줌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박봉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멋진 번역팀을 만들어서 기사 한 번 나 보는 게 제 꿈입니다.
면접관이 묻지도 않은 선언을 했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패기 덕분인지 최근 나는 수월하게 두 번째 이직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판교로 간다!
첫 번째 이직은 작년 초였다. 운 좋게도 번역회사 대신 게임회사 로컬라이제이션 팀으로 올 수 있었다. '번역회사를 탈출한 게 운이 좋은 건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고객사의 프로젝트를 전전긍긍 운영하기보다 내 프로젝트를 온전하게 운영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던 나에게는 무엇보다 운이 좋은 일이었다.
첫 회사에서 이직이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갑(甲)사로 가는 것에 집중했다. 언제나 을(乙)의 입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우스갯소리로 '가서 갑질하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건 '갑'사로 가거나, 번역회사에 외주를 주는 '갑'의 입장이 되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는 나 혼자 온전히 리소스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전 글에도 설명했듯, 번역 회사에서는 보통 여러 명의 프리랜서를 고용하여 일을 맡기거나, 인력난이 심한 경우 PM들이 이력서를 살펴보며 새로운 프리랜서 번역가를 발굴하고 온보딩시키면서 일을 맡기기도 하는데 이렇게 공을 들여 발굴해 낸 인력을 내 프로젝트에만 온전히 부킹(Booking)해놓고 쓸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 열심히 프리랜서를 온보딩 시켜서 CAT툴 교육까지 끝내놓으면 다른 프로젝트에서 홀라당 데려다가 쓰는 일이 잦았다. 프리랜서는 원체 그런 식으로 고용되니 할 말은 없지만, 일이 마구 밀려들어 올 때조차 끌어다 쓸 인력까지 부족해질 때마다 왠지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첫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도 이렇게 쌓인 불만과 좌절감이 속에서 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회사에서는 일이 어떻게든 돌아가기만 하면 방치되는 일이 잦았다. 일이 힘든 건 괜찮았다. 비포괄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필요하면 주말근무까지 불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회사 차원에서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고, 앞으로도 내가 이런 식으로 방치될 것임이 분명해진 시점에는 나에게 '퇴사'라는 옵션만이 주어졌다.
그래서 왜 생존기를 쓰게 됐는가 하면, 번역뿐만 아니라 번역팀을 꾸리고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도 전문성이 필요한데 프리랜서 집단처럼 매도당하는 게 안타깝기 때문이고, 번역 작업자들이 번역 기계처럼 취급받고 곧 AI에 대체될 지속가능성 없는 존재로 보이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을 사랑하고 앞으로도 이 커리어를 계속 발전시켜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때문에 이 글을 읽고 단 한 명이라도 번역 업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번역가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